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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Nov 27. 2023

관장의 달인 - 난 팔이 평균보다 1인치 길어

이런 걸로 유리하고 싶지 않다고요

이제 알았다.

왜 P교수님이 내게 뜬금없이 "변 잘 나와요?"를 물으셨는지. 현재 직장과 질이 꽉 붙어있는 상태라는 걸, 교수님도 알고 계시기에 다른 이슈들도 많은데 내게 그것만 물어보셨다는 걸 알았다. 내막증은 약으로 누르고 지연시킬 수 있지만, 응가는 매일 생기니까.


사실 언젠가인지부터 모르게 (늘 내막증은 서서히 진행되다, 인지했을 땐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인셉션의 파도처럼 나를 압도하고 짓누른다) 배변 장애가 있었다. 처음엔 작은 아이 양치할 때 세면대에 발돋움을 시켜주는 작은 의자를 발치에 놓고 응가를 누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 더 쪼그린 자세가 되어, 변이 수월하게 나온다고 어디에서 봤다. 그땐 수술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기도 해서, 배에 힘이 없어서 못 밀어내나 보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요령껏 배변을 했다. P교수님이 비잔과 함께 마그밀이라는 완하제를 1년이나 처방해 주셔서, 긴 기간 동안 약빨로 응가를 누었고 이런저런 배변장애가 있어도 대장도 그때 수술했으니까, 하며 이해했다. 가끔 하던 발받침을 이용한 용변누기 자세가 꽤 편한 것 같아서 매일의 루틴으로 자리 잡게 됐다.


최근에는 어떤 날은 돌연 항문 안쪽에 변이 굳어져 골프공같이 딱 막히는 날들이 있곤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무슨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었다든지, 식사나 수면이 불규칙해졌다든지 하는 이벤트가 있었기에 별생각 없이 지냈던 것 같다. 만성변비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은, 또 어떤 날은 하루에 대여섯 차례 설사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P교수님이 변 잘 나오냐고 물으셨을 때, 평균적으로 어쨌든 나왔으니까 "나온다"라고 대답한 미련한 사람이 바로 나다. 로다비. 답 없는 애.


눈이 반짝반짝 떠지던 수술 직후 시기를 지나 2년이 흘러갈 무렵, 나는 다시 아침에 눈 뜨는 게 너무나 힘들어졌고 아침에 아이들 등교준비를 시키면서 짜증을 많이 내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체중과 상관없이 내가 느끼는 몸이 가뿐했을 때는 하루종일 이것저것 하면서 하루를 알차고 길게 썼었는데, 어느샌가 차츰차츰 낮에도 쉬이 피로해져 눕는 날이 많아지니 다시 옛날처럼 하루가 짧아졌고 다리가 무거워 짐짝같이 끌면서 걸었다.


만성적인 등 저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요가를 다시 시작했지만 등 저림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친한 언니가 SNPE라는 운동을 소개해 주었고 다나손, 롤러, 웨이브베개 등 살벌한 기구들 위에 등짝을 굴려대니 등 저림이 개선되었다. 기존의 통증을 새로운 통증으로 잊은 것이다. 다행히 SNPE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도 작은 공간 안에서 나 혼자서도 그냥 좌우로 앞뒤로 냅다 구르면 되니까 천생 집순이인 내 적성에 딱 맞는 운동이라서 앞으로도 계속하게 될 것 같다.


분명히 냉도 줄었고 약 덕분에 생리를 안 해서 매달 생리통에 시달리지 않으니까 삶의 질이 올라간 것 같긴 한데, 나는 맨날 왜 이렇게 피곤하고 체력이 약할까. 아아 코로나가 이제 일상화가 되어서 다시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시기가 돌아와서 너무 피곤해. 나이 사십이 다가오니까 정말 늙나 봐 등등의 생각을 많이 하던 차였다.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게 좌약형 관장제라, 나는 가끔 동네 산책을 할 때면 약국에 들러 500원짜리 그 약을 만원 어치씩 사다 화장실 찬장에 쟁여두고 사용했다. 바디버든 한다고 마침 천연오일을 샀거든. 그걸 살짝 이용해서 좌약을 쏘옥 넣었다.


한 번은 남편이 변비가 생긴 것 같다고 하길래, 내가 요령을 알려줬더니 한참 화장실에서 해보다가 안된다고 나왔다. 자긴 아무래도 팔이 안 닿는단다. 나는 보통 옷을 입으면 소매가 짤막한 편이다. 팔이 길어서, 이럴 땐 좋구나 싶으면서도 이게 좋아해야 할 일인가 싶어 쓴웃음이 났다.





#파란만장하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겠죠

#저는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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