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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Nov 16. 2023

레서판다를 닮은 비뇨기과 교수님

환자 입장에서 바라본 진료실 일지

병원을 갈 일이 많아지고, 진료를 보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 또한 그만큼 길어지게 되면서, 우리 부부는 대기실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았다. 교수님 방 앞의 전광판에 접수된 환자 이름이 쭉 뜨는데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이름 중 한 글자를 가리고 로*비 혹은 로다* 이렇게 뜬다. 내 순서만 기다리기가 지루하고, 아직 멀은 줄 알면서도 하염없이 그 전광판만 보게 된다. 유튜브 영상 같은 걸 보려고 해 본 적도 있었지만 마음이 초조하고 긴장돼서 그 무엇도 잘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전광판에 뜬 이름 중에서 우리가 아는 지인이나 유명 연예인의 이름을 찾았다.

"오, 고현정 씨는 여기 웬일이지? 아이고 선근증이 심하신가 보네. 그것 참 고생인데. 촬영 스케줄 가셔야 할 테니 나보다 먼저 하셔야지."

"나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유나 누나도 여기 지금 어디 와있나 보네. 오랜만에 여기서 다 보겠네."

이런 식이다.

그런데 그 이름의 실제인물이 지척에 있을 것이므로, 우리의 이런 귓속말 농담도 얼마 가지 않아 마무리된다.


그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이곳에 와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저분은 척 봐도 어려 보이는데, 어디가 아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저분은 겉으로는 정말 건강해 보이는데, 남모를 고통과 아픔이 있어서 여기 있나 보구나.

입원 안내를 받는 분에겐 부러움 가득한 눈길을 보내게 된다.

"우와아 드디어 내일 수술받으시나 봐. 좋겠다아."

내가 그러면 남편은 "당신보다 더 오래 기다리셨겠지. 잘 되셨으면 좋겠다. 우리도 힘내자." 말해준다.




산부인과는 여자들만 오는 과니까, 남편이 동행하거나 아주 젊은 환자의 경우 엄마와 오기도 한다.

그런데 비뇨기과를 가니 남녀노소 모두 모여 있었다?

그렇지, 방광은 누구나 있는 기관이니까, 의대는 세부 전공을 비뇨기과를 해야 되네. 손님 많네 하며 우리끼리 얘기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이거 끝나고 맛있는 거 뭐 먹으러 갈까 그런 잡담도 하면서 기다리던 중 갑자기 교수님 방에서 아주 화가 많이 난 호통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 또 담배를 폈다고? 거 지금 어떻게 될라고 담배를 펴요, 담배를!! 환자분이 이런 식으로 하면 치료 하나마나예요!!!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담배를 폈어, 엉?!!"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교수님의 극대노가 이어지다가 진료실 문이 열렸다. 잔뜩 의기소침해지신 연세 있는 아버님이 나오셨다.

담배가 비뇨기 질환자에겐 엄청 안 좋은 건가 보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내 이름이 불렸다. 앗, 지금 내 순서라고?


교수님이 극대노가 아직 채 풀리기도 전에 내 순서라니. 나는 담배 안 폈는데 괜히 쫄아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레서판다를 닮은 우리 비뇨기과 교수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스텐트하고 나서 그동안 좀 어땠냐고 물으셨다.

그 순간 생각했다. 의사를 한다는 건 진짜 극한직업이구나.




쉴 새 없이 진료를 보시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늘 대기지연이 생기곤 한다. 어떤 한 사람이 길게 시간을 쓰면 고속도로 유령정체처럼 뒤로 쭉쭉 밀리는 건 당연하겠지, 싶기도 하다만, 어쩌면 이 목록 자체가 애초에 매일 너무 촘촘하고 빽빽하게 설계된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몰려드는 많은 환자들을 보시려면 상황에 의해 떠밀려 기계처럼 차갑게 하지 않고서는 선생님 본인의 감정소비가 너무 심해서 버티시질 못하겠구나.





나는 골골대는 몸을 가졌지만 만남의 복이 있는지, 비뇨기과 교수님도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 감사하다. 극대노를 활화산처럼 뿜으시다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신 우리 레서판다상 교수님은, 스텐트 시술 후 천막으로 가려놓은 내 얼굴 옆까지 친히 오셔서 산부인과에선 뭐라고 하더냐고, 비뇨기과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단 콩팥 잘 살려놓았으니 걱정 말고 앞으로 힘내서 치료 잘 받으라고 좋은 말씀도 해주고 가셨다.


우여곡절 많았던 대학병원 P교수님도 본인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범위 안에서 내 수술을 집도하셨으리라고 믿는다. 수술장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환자와 보호자는 알지 못하니, 이렇다고 우겨도 사실 환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때 내 수술 잘못되고 나서 직접 병실에 찾아오셔서 미안하다고 하신 것도 그렇고 앞으로 자기가 있는 한 다비씨 초음파진료비는 평생 안 받겠다고 하신 것도.

이번에 일이 이렇게 되어 교수님이 내 눈을 피하셨지만, 여기까지가 P교수님의 한계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병이 너무 끈질기고 악랄한 놈이라... 자궁내막증은 암보다 더 끈질기고 양성 종양 중에 최고로 악당 같은 질병이라고 하지 않는가.

영 나쁜 사람이었으면 그런 사과나 배상 같은 거 일절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가는 곳마다 좋은 간호사 선생님들을 만났고 그녀들은 때로 나와 함께 기꺼이 울어주기도 하였으며 나의 회복에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리고 낭만닥터 김교수님

다른 병원 환자는 안 받겠다 왜 병원을 옮기냐 하실 수도 있는데 반복된 수술을 받아도 여전히 통증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나 같은 여성들을 안타깝고 긍휼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니 정말 감사하다.

먼 길 돌고 돌아 선생님을 만났지만, 이제라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내가 다른 병원을 전전하며 헤매는 동안 교수님의 수술 기법은 더욱 발전되고 세련되어지셨을 것이니 말이다.


이것은 분명 나의 복이다.







#만남의 복

#감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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