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기억들을 떠올리다 보면 항상 같이 생각 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 할머니다. 난 할머니의 첫번째 손자다. 늘 첫번째는 특별하다. 첫사랑 첫여행 같은 것들. 나도 할머니에게 특별히 사랑받고 자랐던 것 같다.
어렸을때 할머니댁과 가까이 살아서 주말마다 가서 자고 왔다. 7명의 사촌들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다들 또래라 싸우기도 많이 하고 잘 놀기도 했다. 애정에 늘 목이 말랐던 나는 잠들때쯤 할머니한테가서 귓속말로 이렇게 묻곤했다.
할머니 애들중에 누가 제일 좋아요?
할머니는 꼭 귓속말로 대답해 주셨다
할머닌 너를 제일 좋아해
이건 할머니와 나 사이의 비밀 이야기였다. 이걸 다른 동생들이 들으면 질투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 말을 간직한채 기분좋게 잠들곤 했다. 어른이나 애나 달콤한 말엔 맘이 쉽게 열린다.
할머닌 집안 식구들에게 때론 엄하고 때론 한없이 인자하신 분이셨다. 모두들 할머니의 따뜻한 이성을 존경했다. 동화속에 나오는 그런 따뜻한 할머니였다. 하지만 당연히도 할머닌 동화속 인물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병이 할머니에게 닥쳤다. 치매. 듣기만 해도 꺼림칙해지는 병. 너무나 슬픈 일이다. 할머닌 같은 이야기를 하루에 수십번씩 반복하시기 시작했다. 같은 얘기를 밤새도록 하는 주사를 가진 사람 같았다.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아주 슬프면서 동시에 지겨워져서 죄책감이 들곤 한다.
최근에 할머니댁에 가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6.25 전쟁때 얘기를 해주셨다. 할머니가 전쟁을 겪은 세대란걸 잊고 있었다. 말씀하신적이 없기도 했고.
서현아 할머니가 얼마나 태평한 사람인 줄 아니? 예전에 전쟁났을때 다들 앞마당에 이불을 깔아놨었어. 폭탄이 떨어지면 폭발하지 말라고. 하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식했어. 무식했지. 그러곤 식구들이랑 다같이 마루 밑에 숨어있는거야. 그런데 숨어있다가 날도 덥고 너무 졸린거야. 그래서 할머닌 기어나와서 마당에 깔아놓은 그 이불 위에 대자로 뻗어서 낮잠을 잤다는거 아니냐. 커~ 아부지가 뭐라고 하건말건.
이 이야기를 들었을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할머니에게도 어린 소녀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고 심지어 꽤 당찬 소녀였다는게 귀여웠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던 사람이 긴 시간을 살아와서 나의 할머니가 된 거구나. 그리고 할머니의 소녀시절엔 전쟁이 있었구나. 전쟁앞에선 다들 무기력하다. 할머니의 가족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집의 온 이불을 마당에 깔아서 폭탄이 푹신푹신한 곳에 떨어지길, 그래서 불발되길 바라는 말도 안되는 꿈을 꾸는 거였겠지. 끔찍한 시간들을 지나와 나이가 들었는데 좋은 기억들만 사라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치매는 최근 기억부터 없어진다는데 할머니의 마지막쯤에 남는 기억이 전쟁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아니었으면 좋겠다.
삶은 짓궂은 농담같은 거라는 말을 할머니를 보며 다시 떠올린다.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오래된 기억속에 좋았던 일만 가득했음 좋겠다. 전쟁처럼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위 이야기처럼 희화화되서 기억되면 좋겠다. 할머닌 긍정적인 분이시니까 꼭 그렇게 하실 수 있을꺼야 라고 나 자신을 다독인다. 그래야 덜 슬플것 같아서. 내가 받았던 사랑의 반의 반이라도 해드리고 싶다. 할머니가 나에게 속삭여 주셨던 것처럼 나두 할머니께 해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