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을 다니며 일했던 곳은 매일 새로운 이슈가 흘러가듯 지나갔다. 나는 종종 대표님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했다. 사회 경험이 부족했고, 경영의 흐름을 읽는 데 서툴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게 요구한 것들이 이제 와선 당연한 것들이었음을 깨닫는다. 당시의 나는 그저 부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일을 그 방식대로 진행하면 안 된다는 고집으로 충돌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가 내 의견을 하나하나 듣고, 함께 토론하려 노력했던 기억은 여전히 감사하게 남아 있다.
어느 날이었다. 대표님이 말했다. 삼청동에 매장을 만들어보자고. 그 당시의 삼청동은 안국동과 함께, 사람들이 일부러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었다. 오래된 마을버스 기점 근처에 있던 재즈카페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삼청동에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계속 이어졌다. 아트선재와 정독도서관을 잇는 길 아래, 아니면 파출소 근처의 빨간 벽돌 건물, 두 장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파출소 쪽의 건물은 붉은 벽돌이 견고했고, 고요하게 서 있었다. 반면 정독도서관 아래의 한옥은 단층으로, 예전 한정식집이 있던 자리였다. 입구부터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조용히 구조가 짜여 있었다. 마당과 이어진 흑집과 한옥의 운치는 너무도 좋았다.
그 시절, 사람들은 한옥의 공간을 재해석하기보다 모던하게 벽돌이나 시멘트로 개성 있는 건물을 짓고는 했다. 그렇게 비어 있는 한옥을 보니, 생경하기도 했지만 그 옛 결을 살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자연과 연결되는 나무의 틀 속에서 이 공간을 지켜보고 싶었다. 선조들이 만들어온 방식처럼, 과하지 않고 은은하게, 소박하게.
우리는 정독도서관 쪽을 택했다. 한 달여 간의 공사가 이어졌다. 마당이 보이는 곳에 천장까지 닿은 자작나무 두 그루를 들여왔고, 햇살이 드는 쪽에는 책장을 올렸다. 조그만 갤러리를 만들고, 탐조 장비들을 창가에 두어 사람들이 밖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본체는 회의실과 체험 공간으로, 그 안의 방들은 사무실로. 공간은 넓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아늑함을 주길 원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마당 쪽, 자작나무 사이로 햇살이 잎사귀를 넘어 책장 위로 스며드는 자리였다. 그 아래에서 책을 펼치면, 책 위로 그림자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 감동은 아직도 내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 매장 바로 앞에 ‘아라리오 서울’이 들어섰다. 삼청동의 골목마다 작은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철물점 자리에 생긴 은 소품 가게, 곰탕집, ‘샐리 샌드위치’와 갈비 냉면집, 작고 소박한 파니니 가게, ‘먹쉬돈나’ 떡볶이집, 할머니가 운영하던 라면집, 아트선재 앞 돈까스집까지. 다듬어진 길을 따라 주말이면 사람들이 늘어섰고, 우리 가게도 그 사이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때로는 지나가던 인테리어 잡지 기자나 해외 관광 가이드가 우리 공간을 소개하고 싶다며 인터뷰를 청했다. 우리 공간은 그렇게, 조용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갔다.
*이곳의 정확한 주소지는 '서울시 종로구 화동'으로 오늘 날짜 기준으로 '베스킨라빈스 삼청마당점'이 들어와 있다. 당시 우리는 이쪽 지역을 삼청동으로 묶어서 지역 소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