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기는 모든 재학생들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논문 중간 평가가 있었다. 학과에선 아직도 이 일정에 무사히 통과한 기수가 없었다. 1기 선배들은 첫 기수라는 상징 덕분에 교수님의 배려로 졸업했으나, 그들조차 주제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들었고, 이후로도 다음 기수들은 논문으로 인해 한 학기씩 늦어져 가는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2기 선배 두 명, 3기인 나와 동기 두 명이 함께 이번 중간 평가에 나섰다.
평가 대상자들은 각자 생태학적 주제에 몰두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문제, 친환경 장례문화, 그리고 생태 및 대지 예술가 마야 린(Maya Lin)에 대한 연구들이었다. 그런데 나 혼자만이 달랐다. 나의 논문 주제는 로봇이었다. 동기들과 선배들은 내 주제의 취지를 이해하고 공감해주었지만, 교수님을 설득하는 일은 다른 문제였다.
“왜 하필 로봇이지?”
나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공지능이 불가피한 시대적 흐름이라고 여겼다. 내가 공부한 자료 대부분은 이 흐름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2006년, 로봇이라고 해봤자 국내에서 겨우 개발된 카이스트의 HUBO 정도가 전부였다. 인공지능 또한 막 시작 단계에 있었으니, 교수님과 학과 분위기는 이를 아직 허황된 이야기로 여겼다.
그럼에도 나는 확신이 있었다. 과학과 지식의 진보는 저지하기 어렵다는 믿음, 변화의 흐름은 멈출 수 없다는 신념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믿음은 영화에 대한 나의 옛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생 때 우리는 6mm 디지털 캠코더로 영상을 찍곤 했다. 그 디지털 영상은 컴퓨터로 전송하고 편집할 수 있어 편리했지만, 그 당시 영화사에서는 35mm 필름을 사용해야만 큰 스크린에서 제대로 구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과제로 16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던 적이 있는데, 인화된 필름을 영사기로 벽에 투사했을 때, 고흐의 그림처럼 떨리는 빛과 색채의 떨림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모니터가 아닌 공간에 투영된 그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루카스 필름이 디지털로만 제작된 스타워즈를 발표했고, 모든 영화 산업은 디지털로 급속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필름의 감수성에 집착하던 영화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새로운 장비와 기술이 모든 제작 방식을 바꿔 나갔다. 경제적 논리와 기술의 발전은 결국 인간의 감수성마저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경험으로 인해 나는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대학원에서도 품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로봇이라는 주제 또한 이러한 필연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마 교수님과 학과의 감수성은 자연과 친환경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안다.
당시의 나는 그저 자신만의 신념을 고수하려 했던 학생일 뿐이었다. 세상의 변화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내 주제를 끝내 이해 받지 못했던 그 우울한 시간은 길고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