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언제부터 나에게 삶의 일부가 되었을까.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는 그 시작을 찾는다.
일본 도쿄의 어느 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친 가습기.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형태 안에 기능이 담겨 있었고, 그 안에는 작지만 온전한 세계가 있었다. 나는 가습기를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멈춰 서 있었다. 나오토 후카사와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의 디자인은 간결함 그 자체였다. 불필요한 것은 모두 덜어내고, 남겨진 형태로 감성을 말하는 방식. 2000년대 초,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그를 지나쳐 갔고, 나 또한 그의 길을 따라 걸었다. 미니멀리즘의 해석, 전통적인 일본 문화의 현대적 변주. 지금도 그의 초기 디자인이 담긴 계산기와 필기구를 손에 쥘 때마다, 나는 그 작은 물건 들로부터 배운다.
하라 켄야를 만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했다. 손끝으로 느끼는 것들, 소리 없이 전해지는 감각. 그는 햅틱이라는 개념을 이론으로 정리했고, 나는 그의 가르침을 내 작업 속에 담기 시작했다. 소재와 마감, 보이지 않는 곳에 깃든 배려. 그의 미니멀리즘은 후카사와와는 또 달랐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깊은 존중과 맞닿아 있었다.
그의 책들은 나의 철학을 단단히 만들어 주었다. 그는 일본의 미학을 넘어, 보편적이고도 인간적인 디자인의 길을 열어 주었다.
프랑스의 아릭 레비. 그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재료와 대화했다. 나무, 금속, 유리. 각각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조형해 냈다. 그의 디자인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공간과 하나가 되는 생명체 같았다. 대학원 시절, 우연히 그의 자료를 접하고 그의 작품이 한국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를 따라 조형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공간과 물건이 조화롭게 공명하는 순간을, 그는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멘디니. 그의 디자인은 장난스러웠다. 그러나 그 속에는 깊이가 있었다. 그는 전통의 색채를 가지고 놀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사용한 색상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그래픽과 제품에 담아냈다. 그의 자서전을 읽던 어느 날, 나는 그의 디자인이 단순히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였다. 한국의 전통 색과 패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제야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그가 했던 일들은 여전히 나에게 충격으로 남아 있다.
디터 람스. 그의 이름은 나에게 성경과도 같다. “좋은 디자인은 환경을 고려한다.” 그의 열 가지 계명은 나의 나침반이 되었다. 초심을 잃을 때마다 나는 그의 책을 펼쳤다. 그의 디자인은 간결함 속에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사명이었다.
IDEO는 나에게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을 가르쳐 준 이름이다. 디자인은 형태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모으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는 방법. 그들은 모든 문제의 본질을 ‘Design Thinking’으로 풀어냈다. IDEO는 나에게 디자인의 체계를 가르쳐 주었고, 그 체계는 나의 작업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이름들이 나를 이루었다. 그들의 철학과 작품, 그들의 시선이 나의 길을 밝혀 주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흔적을 좇아간다. 디자인이란 결국, 이름으로부터 시작해 자신만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