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회사에 도착하면 이메일을 정리하고, 오전 팀 미팅을 끝낸 뒤 늘 같은 흐름이 이어졌다. 대표이사가 사내를 천천히 돌다, 우리 자리 쪽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는 별말 없이 서 있거나 가끔 한두 마디를 건넸다. 그런 모습 속엔 고민을 제품으로 풀어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 있었다.
대표이사는 회장님의 큰아들이었다.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을 이어가는 2세 경영자였다. 회사는 50년이 되었고, 이미 7, 80년대에 코스피에 상장했던 오래된 기업이었다. 지금도 회사의 주력 제품은 대부분 회장님 시절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경제개발이 국가적 과제였던 시절, 필기구 제조로 회사를 성장시킨 회장님은 그 세월을 견인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이 삶의 중심이 되면서, 필기구의 자리는 점점 작아졌다. 매출은 정체되었고, 그 정체는 매년 우리를 따라다녔다.
대표이사는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새로 시도된 사업은 기존 제조업과는 결이 달랐고, 긴 시간 지속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회사의 새로운 돌파구는 ‘프리미엄화’라는 방향으로 맞춰졌다. 한국의 많은 중저가 브랜드들이 선택한 길이었다. 저가 중국 제품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고, 제품의 질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우리도 중국의 저가 제품에 늘 위협받고 있었고, 일본 기업들도 비슷했다. 그래서 친환경 제품이나 프리미엄 브랜드로의 확장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대표이사에게 독일 레드닷 디자인 수상은 가능성의 신호였다. 그는 우리 팀이 더 다양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나는 파트장 겸 팀장으로 일하며, 대표이사가 던진 방향성을 고민하며 움직였다.
그 즈음부터 나는 명품 브랜드를 스터디하기 시작했다. 대표이사는 명품 브랜드를 많이 사용했고, 내 자리로 와서 자신의 물건들에 대해 설명해 주곤 했다.
“이 시계가 왜 이 가격인지 아는가?”
“에르메스가 이런 제품을 이 가격에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는 브랜드의 철학, 제품의 차이점, 시장 구조에 대해 짧게 던지는 말을 남기곤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따로 공부를 시작했다. 명동 에비뉴엘에 가서 브랜드 매장을 하나씩 들르며 실물을 확인했다. 시계, 패션, 소품.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관찰하며, CMF를 파악했다. 그런 과정에서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그 무렵, 대표이사는 회사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한정판 볼펜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단, 기존의 300원짜리 스테디셀러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것을 원한다고 했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다양한 소재와 가공 방식을 찾았다. 어떤 제품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논의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결국 하나의 제품으로 향했다. 그것은 6각형의 볼펜, 153이었다.
출시 당시 혁신적이었던 이 볼펜은 한 시대를 상징했다. 사람들은 이 제품을 통해 잉크를 묻히는 불편에서 해방되었고, 기록은 더 편리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 볼펜은 흔해졌다. 관공서, 학교, 집 어디서나 굴러다니는 흔한 물건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제품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153 볼펜이야말로 회사의 ‘헤리티지’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디자인의 완벽함, 디터 람스를 연상케 하는 합리성과 기능미. 디터 람스가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필기구를 디자인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스케치를 했다. 153의 틀을 유지한 채, 프리미엄으로 갈 수 있는 CMF를 고민했다. 어쩌면 디자인이란 늘 그런 식으로 고민하고 부딪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153은 그 고민의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