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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시작하는 변화의 여정

by 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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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과의 미팅 이후, 나는 디자이너들에게 실장님에 대해 물었다.

조심스레 한 디자이너가 내게 말했다. 실장님에게 직접적인 의견을 이렇게 얘기한 건 처음이라고.

다른 디자이너들도 말했다. 실장님보다 제작팀에 대한 불신이 더 커서 어려운 걸 알면서도 물어보셨을 거라고.

그건 비단 디자이너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발실 전체의 문제처럼 보였다.


개발 담당 팀장들을 하나씩 만났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똑같았다. 제작팀. 그리고 원가 이야기.

제작팀에서 주는 원가가 늘 높아서, 자신들이 기획한 작업물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는 불만.

그 말들을 들으면서 전 회사에서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레드 닷 수상을 기점으로 우리는 제품 디자인에 대한 입지를 조금씩 다질 수 있었다.

컬러칩을 만들고, 양산 컬러 품질을 일본 제품 수준으로 맞췄다. 디테일한 제품들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 과정은 참으로 험난했지만, 그 끝에 설계와 제작, 디자인이 하나의 목표점을 공유하게 되었고, 일은 더 나아졌다.

153 한정판을 만들었을 때, 더는 그 과정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동기부여는 디자인의 신뢰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또다시 반복해야 한다니.

머리 한구석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혼자서 해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도울 사람도 없고, 방향을 정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 즈음 실장님께서 내 보조 디자이너가 이미 정해졌다는 말을 건넸다.

신입이었다. 학교를 갓 졸업하고 파견근무를 나가 있던 디자이너.

가르칠 사람이 생긴다는 게 참 복잡한 마음이었다.


회사에 제품 개발 프로세스도 잡아야 하고, 아이디어 회의실도 없이 회의를 해야 했고,

방법도 타 팀과 공유해야 했다. 장비 세팅도 해야 한다. 프로그램도 다 새로 들여야 하고.

개발팀과의 끝없는 미팅도.

그리고 도와줄 신입도 아직 일을 배우는 단계.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 그려본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결국 제작팀 팀장님부터 만나기로 했다.

그분이 나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제작팀과는 긴밀히 협업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팅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제작팀이 문제라기 보다는, 개발실 전체가 문제처럼 보였다.

여자 직원이 많아서 그럴까, 제작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서 일까.

개발팀은 제작팀에 의존했으면서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불만을 쌓아갔다.


제작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하소연은 다른 곳에서도 들어본 말들이었다.

생산량이 너무 적어서 공장조차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전 회사에서는 적게는 만 단위, 많게는 백만 단위로 생산했다.

그런데 이 회사는 달랐다.

적게는 500개, 많아도 5000개 수준.


생산량이 적으니 원가 절감이 어렵고, 공장은 주문 자체를 꺼렸다.

그것이 제작팀이 반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었다.


현실적으로, 생산 공정을 서로 투명하게 공유하며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개발팀의 요구와 내가 설계하는 방향에 따라 세부 내용이 달라질 테니 데이터 공유가 중요했다.


그들도 책 제작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교구나 제품 제작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내가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해야 했고, 가공 방식이나 소재를 설명해야 했다.


다른 제품디자이너들과 미팅을 했을 때 이런 상황을 공유했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미친 짓이야. 이런 걸 혼자서 어떻게 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결국 그것이었다.


문제들이 보였다. 그러니 해결도 보일 것 같았다.

그 방향에서 먼저 신입 디자이너를 파견지에서 데려오기로 했다.

1년은 기본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지만, 실장님과 전무님께 부탁해 6개월 만에 본사로 복귀하도록 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기에.


나와 맞춰야 할 신입 디자이너.

그걸 시작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겠다는 마음을 정리했다.


돌아오는 길.

앞이 막막했지만, 또 한 번 무엇인가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퇴근 길의 피로가 조금은 덜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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