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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 Dec 15. 2019

체념은 또 다른 믿음이라는 사실

♪백예린 - meant to be

난 저항할 수 없죠.
난 어쩔 수 없어요.
난 무력하거든요.



♪백예린 - meant to be ( 운명, 그럴 것이다. ) 


#episode 1 

오랜만에 펜팔을 하는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잘 지내냐며, 자신은 잘 지낸다며 언젠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이른 새해 인사도 함께 건네어 받았다. 괜찮지 않고, 괜찮다는. 마침, 어제 썼던 일기를 인용하여 감사의 답신을 보내었다. 고마울 따름이다. 그 편지에는 '우리는 언젠가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지만 벌써 이렇게 지났네요.'라는 말이 적혀 있었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다. 그래서, 그래요. 언젠가 만나자는 이야기는 답장에 넣지 않았다. 






#episode 2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교회를 다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주일이라고 불리는 날을 맞이하여, 교회를 다녀왔다. 오늘 교회에서의 설교 말씀은 '마가'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고, 열두 제자인 마가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나는 내가 직접 확인하기까지 믿지 않을 거야! 라며 고개를 저었고, 그런 그의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 못 자국을 직접 만지게 해 주었다는 그런- 






" 정말 축복받은 믿음 아냐? "

" 그렇지 않고도 믿는 것이 정말 믿음이지~."


믿음을 가진 지 어언 20년이 넘었는데, 저 질문을 열 번은 넘게 했고 열 번 모두 비슷한 답을 들었다. 오늘도 당연하게도 저런 답이 나올 거라 생각했지. 속상하거나 그럴 일은 없었다. 어떤 나의 믿음에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기도의 응답에는 'NO'라는 응답도 있다고 하고 'STAY'라는 응답도 있다고 한다. 인간의 삶이 중심 된 소망에 기대어하는 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도 들었다.  


나는 그저, 실체 없는 믿음에 마음을 조이다 실체를 경험할 수 있었던 그 순간이 부러웠을 따름이다. 비록, 열두 제자 중 가장 믿음이 약한 것 같이 현세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지만 말이다. 그냥 그 믿음에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진, 그가 부러웠을 따름이었다. 





  

이런 믿음에 체념하는 삶이어도, 어린 시절과 달리 어른이 되어 내가 스스로 교회를 다닐까 말까를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꾸준하게, 그것도 매주 빠지지 않고 나가는 것은 정말도 나는 교회에서 배우는 그 이야기들을 믿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의 내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태반이어도 말이다. 아 맞아, 그러신가 보다. 어릴 적에는 왜 들어주지 않으셨냐며 눈을 감은 채 그렇게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곳에 혼자 소리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은 없다. 하루의 기도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해도,  더 이상 우는 일은 없다. 그냥 운다면 울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체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덕분에 하루의 끝과 시작에 기도함에 감사하는 삶을 산다. 적어도, 살아있다는 거니까.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인지마저 사실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가와 같은 믿음은 잘못되었고, 편지 너머의 지인을 만날 것이라 기대조차 하지 않는 삶이라고 이야기하더라도 내 생각과 다른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체념 역시도 믿음이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 그리고 그렇게 체념하던 삶에 무언가가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보통 나는 기적이라던가, 감사라고 표한다. 체념하는 삶은, 아이러니하게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이다. 야근 중인 오늘,  


" 밥 먹을 거야? " 

" 음... 먹을게요! " 


에도 감사할 정도란 말이다. 혼자 먹을 줄 알았거든.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 누군가의 자리에서 주말이라고 들리게 틀어놓은 음악이 마침 < Sqeare >인 것도 감사하다는 말이다. 어차피 이런 삶인 것, 저런 것이라도 감사하다는 것. 얼마나 멋진 믿음인지. 무슨 이야기를 떠든 걸까. 한동안은 아마 이렇게 노래가 조금 귀에서 엇나갈 때까지 이런 의식의 흐름대로 일기가 써내려 가지겠지.  






언젠가의 기사에서 유명한 작가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표현이 오역이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기사에 적혔던 정확한 영문은 기억이 안 나지만 묘비에 적혔던 저 내용은 사실 이런 말이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오래 이 세상에서 어슬렁거렸고, 이딴 일(죽음)이 벌어졌구먼." 그러니까, 오래 살았고, 언젠가 죽는다는 것 따위, 알고 있었어. 정도일 테다. 기사의 말미엔 교훈으로 삼을 명언은 아니라 했지만 이만한 명언이 어디 있겠나. 세상사 죽음만큼 끝, 을 표현할 언어도 드물 텐데, 그 역시도 그 따위 것. 정말이지, 훌륭한 체념이고, 훌륭한 믿음으로 살아간 삶이기에, 그런 말을 묘비에 쓸 수 있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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