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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 Dec 28. 2019

좋은 삶은, 버리는 것으로부터.

♪백예린 - 다툼

그와 다툰 뒤엔 난 시집을 꺼내 읽어
모자란 내 마음 채우려 늘 그래
그가 없어서 부족한 건데 그래



♪백예린 - 다툼


"여기 있는 것들은 이제 버려도 되지 않겠니?" 

방에 들어오셔서, 얼마 전 새로 구해드린 스마트폰의 사용법을 묻기 위해 들어오신 어머니는 설명하는 내가 무색하게 방을 휘 둘러보시며 화면 대신 어느샌가 차곡히 쌓인 신발 박스들을 보며 말씀하셨다. 생각난 김에 서너 켤레 정도의 신발들을 버렸다. 평소에 손이 잘 안 가던 운동화나 구두들. 그래서 그 핑계로, 집 안을 정리했으니(?) 구두를 한 켤레 사 오겠다고 으스거렸다. 






사실 사고 팠던 구두는 한 켤레에 50만 원이나 하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비싼 구두였는데 차마 처음부터 그런 구두를 구경하면 다른 구두는 눈에도 안 들어올까 싶어 가장 국민 구두라고 할 수 있는 금강제화를 방문했다. 어디서 또 본 건 있어서 유튜브에서 핫하다는 모델들을 나열하며 신어보았다. 오늘 착장을 하고 갔던 옷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모양새였지만 구매를 해볼까 해서 사이즈를 물어봤더니 전국적으로 품절이라더라.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어울리지도 않았으면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정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구두와 어울릴만한 옷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름 무신사에서 골드 회원인데, 옷을 그래도 남들보다 많이 샀다는 증거인데도,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그렇게 옷을 산 것 같다. 그렇다고 좋은 옷도 아니다. 보통 50-60% 세일하는 저렴한 그런 것들을 샀다. 


이게 악순환인게, 그런 대충 충동적으로 샀던 옷들과 어울리는 옷들을 이어서 사게 되고 그렇게 정신 차려보니 돈은 돈대로 썼는데, 그렇게 애정 할만한 아이템들은 없는 묘한 옷장과 신발장이 완성되었다. 






일을 하면서 우스갯소리로 '마음이 허해서 문서라도 여백 없이 꽉꽉 채우냐'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정말이지 옷장이나, 신발장이 그런 꼴이었다. 버려도 상관없을, 사실은 넣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인데 올 한 해는 무엇이 그렇게도 허했길래 아직도 택도 떼어내지 않는 것들도, 심지어는 박스에 고이 있는 것들이 아직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끼는 것도 아닌. 


그런 것들이 모두 혼자 살아가며 고민하고 싸운, 쌓은 흔적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한 해의 마지막을 앞두며 여기까지 살아온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어리석다며 자책했다. 그만큼 힘들었을 테고, 그만큼 무식하게 산 기분이 들었다.  






다음 주에 있을, 올해의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점검하며 머릿속으로는 집에 있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옷도, 신발도, 물건도, 무엇도, 심지어는 지금 달고 있는 뱃살도. 프레젠테이션에서 이런 건 빼고 저런 것도 빼도 괜찮다고 체크하며 떠올렸던 물건들을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했다. 


식상하지만 곧 새해. 일단은, 비우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미루고 미루던 헬스장도, 병원도 이번 주에는 예약을 해야지. 물건도 버리고, 살도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나면, 그렇게 쌓아놨던 '무언가'들이 비워지면 좀 더 좋은 것들로 소중하게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조만간 50만 원 하는 구두를 보러 갈 테다.라는 다짐 같은 마음이다. 

절대 금강제화 구두가 품절이어서는 아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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