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감춰진 세상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던 날이 있었어 이제는 억지스러운 희망을 발명해 악당조차 되지 못하고
♪쏜애플 - 2월
누군가와 여행을 간다는 것은 어색해서, 가족여행인데도 "호... 혹시 나 혼자 싱글룸에서 자면 안 될까?"라고 했다가 구박을 받았다. 자의는 아니지만 이 나이 먹고도 아직도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 사는 불효(?) 자식이면서도, 내 공간이 없이 가족과 함께 한 방을 쓰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색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을 갔던 것이 5-6년 전 즈음이었던가. 유독 아버지가 많이 들떠하셨다. 삼교대를 하는 동생과, 바쁜 티는 혼자 다 내는 아들내미와 떠나시는 것이 그렇게 좋으셨나 보다. 무뚝뚝한 아버지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여행이란 그런 것인가 하며 출발했던 부산에서, 이박삼일 간을 잘 쉬다 왔다.
바람이 많이 불고, 맑았던 날이었다. 비를 부르는 사람(?) 답게 첫날 여우비를 맞았지만.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아 그래. 아버지는 평소 주무실 때 이도 가시고, 코도 크게 고시는 편이다. 가끔은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오셔서 거실에서 뒤척이시는 때도 있으시니. 그리고 나는 잠귀가 밝고 예민한 편이라 늦게 잠들기도 하지만 잘 깨기도 한다. 어머니가 이틀만 참으라며 웃으셨고 그렇게 첫 밤이 왔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일찍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셔서 열두 시 전에는 거의 무조건 주무시는 편이고, 여행에서도 다름없이 자리에 드셨다. 나도 불을 끄고 침대에 등을 기댄 채 가져온 노트북으로 잠깐 글이나 쓸까 하다 타자 소리에 깨실까 싶어 휴대폰으로 하루 간 못 봤던 이런저런 것들을 넘겨보았다. 새벽 두 시 즈음되었을까.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아버지가 누워계신 침대를 보니 코를 골지 않고 계셨다. 이도 안 가시고. 그렇게 꽤 고요한 밤을 보냈다.
둘째 날의 아버지는 무려 새벽 두 시에 주무셨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쉬우신지, 계속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셨다. 어릴 적의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 앞으로의 이야기. 자식에 대한 - 그러니까 나와 동생에 대한 -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 등등. 아버지가 이렇게 말수가 많으셨던가. 아버지와 이렇게 길게 대화할 일이 없었던지라 최대한 새겨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도 조용한 밤이었다. 여행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개인적으로 떠나는 여행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먹었음에도 이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여행이지만 이 것이 제일 먼저 떠오른 걸 보면, 그렇다.
맞다. 또 좋았던 것을 고르자면 역시 바다다. 사계 중, 겨울 바다를 가장 좋아한다.
사실 여행은 전혀 내가 즐기는 방식의 여행은 아니었다.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스팟을 팍팍 찍고 넘어가는 식의 여행과 인터넷에서 유명할 법한 곳에서의 식사.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았다. 가까이에 있기에 잘 알 것이라 생각했다. 이 나이까지도 함께 살았으니, 남들보다도 잘 알 것이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 너머 안방에서부터 들리는 아버지의 코골이 소리에 그것을 새삼 더 느꼈던 것 같다. 여행 내내 잠결에서마저 배려와 보살핌을 받았다.
아버지는 둘째 날, 이제 자신도 육십이 넘으셨다며, 그래서 사실은 손주도 보고 싶고 그런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너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자신은 그것만 있으면 행복하다며, 손주를 보고픈 마음이 더 크지만, 너희도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며. 그렇기에, 이야기하는 거라며. 매일 같이 건조한 잔소리보다 훨씬 마음이 아프고, 감사하고 뭐 그랬다. 여행에서 거리를 거닐며, 가족의 거리를 재어보고, 느꼈다. 그런 여행이었다.
" 아들은 여행 어땠어? "
" 정말 좋았어요. 다음에 또 가요. "
2020년 삼십사일 차의 기록
좋은 날 +17
나쁜 날 -17
01.29 : 했던 일은 기억나는데, 아무 감정이 없어 슬펐다.
01.30 :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모습을 봤다.
01.31 : 아버지가 속마음을 이야기하셨고, 슬펐다.
02.01 : 가족 모두가 만족했던 여행이었다 해서 나도 만족했다.
02.02 : 잠깐이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눴더랬다.
02.03 : 아직은 그냥 슬퍼지는 날도 있다. 익숙해져야지.
* 1월의 기록 : 좋은 날 15 / 나쁜 날 16
+
푸르른 바다였지만, 가끔은 검은 것을 가득 안고 밀려들기도 했다.
사실, 여행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슬픈 기분으로 떠날 때가 많았다. 사실 기뻤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 맞겠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턴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들 사이에 숨어 울 줄도 알게 되었고, 그런 날은 타지에서 홀로 여지없이 슬픈 이야기를 잘 써 내려갔다. 이번 여행에서도 가족들은 방에서 쉬고 있을 때 혼자 해안가의 카페에 앉아 몰래 슬픈 편지를 한 통 썼다. 아마 답장이 없을 그런 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