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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ndo Oct 16. 2024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롭게 9]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당장 삶에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 혹은 앞으로도 절대 맺히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절망스러울 때,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청소, 찬실이는 청소를 한다. 무슨 꿈을 꾸며 달리는지도 모르게, 뒤돌면 잊어버리는 그래서 정리와 거리가 먼 그 집에서 열심히 청소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나 고초를 겪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초라한 짐을 이고 현실이라는 산동네를 오를 수밖에 없고, 카메라를 놓고 불어를 가르칠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이렇게 시집은 못 가도 영화는 평생 찍고 살 줄 알았던 찬실이의 삶은 예상치 못한 정전 사태를 맞는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그녀는 성실하게 살아간다. 정돈하며 살아간다. 지저분한 집을 치우듯,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하나 비워낸다. 그리고 결국은 거대한 흙더미 속에서 화석을 발견하듯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이 뭔지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청소의 미학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결말이 보이는 치유와 성장 이야기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오프닝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쇼팽의 장송곡에서 예감했다. 그리고 <뒷산에 살리라>와 오늘만 살다 죽은 감독을 보며 확신했다. 보통 영화가 아니라는 걸.      


오랜만에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났다. 워딩, 말투, 표정, 단어 사이 속도까지 맘에 든다. 게다가 성실하고 정돈된 사람, 짝사랑에게 차여 울었어도 기분과 상관없이 남에게 친절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본투비 유머인... 그녀의 삶에 영화가 숙명처럼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유머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우겨본다. 그 외에도 구석구석 정전기처럼 찌릿한 장면들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단, 크리스토퍼 놀란과 홍콩 영화파가 아닌 것만 빼고. 무간도를 안 본 모양이다. 나는 오즈 야스지로 보다는 구로사와 아키라, 장국영보다는 양조위라고 괜히 대화에 끼어 들어본다.      


처음에는 잘 때 빼고는 다 움직인다는, 뭐든 잘 까먹는 소피의 사랑스러운 호들갑이 이 영화의 킥이구나 싶었는데, 더 센 게 나타났다.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너무 참아서 화병으로 속옷만 입고 다니는 장국영... 아 이 사랑스러운 위로쟁이는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리고 한글은 잘 몰라도 그보다 복잡한 삶은 누구보다도 꿰뚫고 있는 할머니가 날리는 촌철살인과 보듬음. 그리고 언젠가는 꼭 영화를 다시 만들 것 같은 빼놓으면 서운할 영이 씨. 그런데 영이 씨의 그 '영'은 장국영의 '영'일까?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키노>를 묶어 버리는 모습에 마음이 덜컹했다. 하지만 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잘 쓸고 닦았다. 방 안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참 외롭겠지만, 그녀는 앞으로도 매일 오늘 하고 싶은 일을 애써서 성실히 할 것 같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그렇게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라는 담담한 고백에 ‘맞아’라고 대답해 본다. 그리고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다고, 그 안에 영화가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본다. 눈앞에 열매가 간절해 보여도 그것보다 중요한 건 삶 자체라는 평범하지만 거대한 메시지. 목표를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목표를 가진 것뿐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과 함께하고 우정을 나누며, 사랑하고 받는 것이 영화보다 중요하다던 영이 씨의 말이 더 크게 울렸다. 정말 찬실이는 복도 많다. 무엇보다도 삶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함께 전구를 사러 갈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찬실이 찬가’를 부르다 보니, 아쉬움에 <산나물 처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보름달이 반가웠고, 감독님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그리고 청소를 한 후에 다시 <집시의 시간>을 보고 싶어졌다.  

      


[Zoom in]     

이런 찬 공기를 세고도 다시 못 일어나면 언닌 사람도 아니야.

- 모기가 있나 보네.

- 내가 다 알아들은 걸로 칠게.

- 아버지는 지감독 영화 별로였다, 잠이 많이 왔다.

-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 차이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 누나 말 놓으세요./ 차차

-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음악]     

음악조차 너무 조화롭다. 쇼팽으로 시작하는 오프닝, 빨간 아코디언에서 흘러나오는 희망가, 

엔딩곡 이희문의 목소리까지...     

https://www.youtube.com/watch?v=ZOYPs8dkH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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