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혁진 Jul 06. 2018

삼별초




 ‘한 장면을 그리는데 3-4일 간의 시간이 들었다.’ <삼별초>를 상찬하는 글들에서 반복되는 어구다. 이 짧은 문장에는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떠도는 어떤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좋은 작화는 현실과 최대한 닮아야 하며 이에 대한 보증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생각은 잘못됐다. 사실적인 작화가 좋은 작화인가를 논외로 치더라도, 일주일마다 한편의 작품을 뽑아내는 웹툰계의 현실에서 비추어보면 이 같은 인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삼별초>의 작업 과정은 분명 미덕이 아니다.

 그렇다면 <삼별초> 작품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위 사례처럼 비판할 지점은  분명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정교한 펜이 재현한 세계에 경이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래서 이 논의에서 필요한건 과도한 노동에 대한 찬사는 거부하되 이로 인해 야기된 이질적 결과물에 대해선 보다 세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신화, 환상의 세계는 어떻게 창조될까?

 <삼별초>는 고려시대 여몽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마지막 격전지 제주도에서 삼별초와 몽고군은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인다. <삼별초>는 일종의 역사 만화다. 하지만 작품이 전개되면서 제주도라는 역사적 공간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는 신화의 공간, 환상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사실 역사와 환상의 공존은 형민우 작품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의 인장과도 같은 것이다.

 광개토 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태왕북벌기>를 보자. 후반부 흉노족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이때 족장 타다르의 모습은 <300>의 크세르크세스 황제를 연상시키며 판타지 장르의 기시감을 일으킨다. 형민우 작가의 대표작 <프리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역사적 배경은 아니지만 문명과 야만의 대립 공간 서부 개척시대를 신과 악마의 투쟁의 장으로 극단적으로 변형시킨다.


(좌)프리스트, (우)태왕북벌기


 <삼별초>를 전작과 함께 신화, 판타지 계열로 엮으려 한다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삼별초>는 철저한 고증을 거친 작품은 아닐지라도 튼튼한 현실에 뿌리박고 있지 않느냐고. 실제로 이 작품은 주인공 보르츄이가 제주도에서 신을 대면하는 환각을 제외하고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전무하다. 그럼 <삼별초>의 신화적, 판타지적 분위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직접 연관성을 갖는 건 아니지만, 19세기 미술사조 ‘라파엘전파’에서 찾을 수 있다.

 ‘라파엘 전파’는 자연 관찰과 세부 묘사에 충실한 초기 르네상스 미술로 돌아가자고 주창한 영국 예술 단체다. 이들은 윤곽선이 뚜렷한 사실주의를 적용하여 모든 세부를 빈틈없이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리려 했다. 라파엘전파는 근대 사실주의의 계보에 속하는 데, 흥미로운 것은 이 사조가 원래 의도와 정반대되는 미적 효과를 창출했다는 점이다.  세부의 충실함이 지나치게 강렬하다 보니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오히려 현실과 멀어진 이질적이고 환각적인 시공간을 창조한 것이다. 즉 사실주의 극한이 도달한 지점은 현실이 아닌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였다.


윌리엄 홀먼 헌트, 1851, <프로테우스에게서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공존. 이것이 <삼별초>와 라파엘전파가 공유하는 지점이다. <삼별초> 는 정밀하고 날카로운 선으로 피사체를 무차별적으로 포착한다. 화집과 같은 매 장면엔 수많은 선이 이어지고 교차하며 그리고 이 압도적인 선의 유동은 제주도라는 역사적 공간에 태고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그 결과 세계는 익숙한 모습을 벗어 던지고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딘가 위치하게 된다. <삼별초>의 첫 장면 신화 세계의 문이 열린다. 신상 같은 거대한 전사는 양쪽 끝 세계를 떠받치고 있으며 그 사이 펼쳐진 광활한 공간엔 바다, 하늘 그리고 늑대가 뛰논다.


재현에서 운동으로의 확장

 <삼별초>의 정밀한 묘사는 신화, 판타지 세계의 초대로만 그치지 않는다. 뿜어져 나오는 수 갈래의 펜 선은 운동-이미지들의 광대한 기계적인 구성을 이룬다. 몽고군이 함정에 걸린 장면을 보자. 그들은 그것을 가까스로 막아내지만, 이내 삼별초의 추가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작가는 여기서 긴박한 전투 상황에 맞게 중간 과정을 적절히 생략함으로써 작품의 긴장감을 증대시킨다. 전투 장면은 확실히 박진감 있고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장면은 속도감 있게 전개되지만, 이 과정에서 몇몇 칸은 운동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의 칸들이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기보다 삽화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체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성은 지속돼지 못하는 걸까? 아니다. 이 균열에는 변증법적 힘이 작용한다. <삼별초>는 운동 속에서 정지됐다 생각하는 순간 다시 역으로 정지 속에서 운동을 발생시킨다. 운동의 지속에서 벗어나 움직임을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그 칸의 장면들에는 운동의 기하학적  패턴으로 가득하다.



 운동하고 있지만 정지하고, 정지하고 있지만 운동한다. 이 같은 정지와 운동의 변증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먼저 세밀하고도 정교한 선은 재현을 넘어 운동으로 무한히 확장된다. 장수를 촘촘히 에워 싼 병사의 모습. 그 리드미컬한 모습은 그 자체로 원 운동을 연상시킨다. 이어 숨막힐 듯한 감옷의 세밀한 질감은 움직임 없이도  내재적으로 진동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아지경으로 엉킨 병사들의 형태는 칸의 틀을 부셔 버릴 것만 같다. 병사들은 무리 속에서 점차 개인의 개성을 상실하며 이때 그들은 개인인 것을 멈춘 채 공통된 시각적 관계 속에 빨려 들어간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나선형 수렴은 결코 하나의 칸 내부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독자의 시선은 사방으로 확산되고 다시 하나의 전체 페이지로 수렴된다. 칸 또한  이 흐름을 따라 운동한다. 내부적으로 상대적 운동을 지속 하면서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따라 여러 패턴으로 결합하다 마지막에 이르러 페이지의 절대적 운동으로 확장한다.  


  <삼별초>는 이렇게 정지와 운동의 변증법을 통해 우리를 무한의 운동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윽고 다다르게 되는 그 곳은 일종의 마술적 사실주의로 승화된 신화적 세계다.

 

작가의 이전글 식물 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