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혁진 Jun 20. 2018

식물 생활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다. 식상할 수 있는 이 구절을 <식물 생활>에 덧대어 보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식물,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나쯤은 갖고 있다고.

 식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식물 생활>은 식물과 관련된 내밀한 경험을 우리에게 나지막이 들려준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 이사 갈 때 버린 ‘선인장’이 아버지와 자신을 이어줬다고 뒤 늦게 깨닫는 후회의 순간. 사람들이 잘 닿지 않는 태백산 중턱, 바람 때문에 눕다시피 한 ‘주목’에서 떨어지는 눈의 소리를 듣는 묵상의 순간. <식물 생활>은 식물을 통해 식물과 다르지 않을 우리의 삶을 보듬고 위로한다.     

 

 <식물 생활> 댓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서 삶의 위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진실된 인물들의 목소리, 한결같은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표현한 완곡한 선으로 이뤄진 그림체. 작품이 건네는 따스한 감정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직관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작품을 온전히 설명 할 수 없다. 위에 나열된 특징들은 분명 <식물 생활>의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힐링 만화’로 불리는 작품의 공통분모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의미한 동어를 반복하기보다 대신 울림을 주는 순간이 언제인지 또는 그 결정적 순간 어떤 제스처를 취하며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지 섬세하게 질문해야 한다.


정물화의 시간

 <식물생활>의 페이지는, 웹툰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니다. 그것은 책의 페이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케치북의 페이지에 가깝다. 채도가 낮은 페이지는 우리를 부드럽게 감싼다. 거칠거칠한 스케치북의 질감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굵은 드로잉 선은 색연필의 흔적을 남기며,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넓은 면에는 수채화와 같은 은은한 색이 채색돼 있다.


 스케치북에 대한 유사점은 그림에서 역시 동일하게 반복된다. 균일한 직사각형의 그림들은 차례로 넘긴 스케치북처럼 차분히 한발 한발 나아간다. 그러다 문득 가슴이 일렁이는 한 지점에 걸음을 멈춘다. 그 앞에는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식물이 단정히 놓여 있다. 시간은 정지되고 텅 빈 공간엔 오직 식물만이 존재를 드러낸다.

 정물화와 대면하는 시간. 생명, 존재 이 모든 생의 감각이 우리 현존에 강렬히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삶을 성찰한다.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떠올리고, 짧은 시간 끝을 향해가는 절화의 모습을 보며 삶을 다시금 가늠한다.      


관계 맺기

 제목이 상기하듯, ‘식물’과 함께 눈여겨봐야 할 대상은 ‘사람’이다. 중심 소재가 식물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건 사람의 몫이며 식물을 통해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물 생활>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식물을 많이 닮아 있다. 겸손하며 또한 선량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식물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화면 중심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칸 모퉁이에서 모습 일부만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자신 역시 공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는 듯 얼굴이 생략된 신체만을 비춘다.



 특히 ‘손’의 이미지는 전 에피소드에서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같은 빈번한 손의 이미지에 의아해 할지 모른다. 손은 동적인 행동에 관계되기에 정적인 장면으로 구성된 <식물 생활>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굳이 손을 집어넣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손이 어떤 장면에 등장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식물 생활>에서 손은 식물의 잎을 다듬을 때, 식물의 보금자리를 옮길 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식물이 한 사람에서 다른 한 사람에게 건네질 때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위에 열거된 손의 행위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모든 행위에는 접촉을 동반하며 더 나아가 관계 맺기와 깊이 닿아 있다. 가지를 쳐내고 잎을 닦아내는 이 어루만짐에는 식물이 단순히 관조의 대상이 아닌 인간과 동등한 교감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식물을 건네는 손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건 식물만이 아니다. 작품에서 언급했듯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타인에게 전하는 일이다.


  이러한 관계 맺기는 식물과 인간이 마주볼 때 보다 분명해진다. <식물생활>에서는 식물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 후  이어진  장면에서 식물을 향한 사람의 모습을 비춘다. 이때의 바라봄은 대상을 포착하려는 공격성이 아닌 관계를 시도하려는 사려 깊은 배려다. 식물과 사람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 둘은 아무 말이 없고 여백의 공간엔 침묵이 감돈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일까? 비록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그렇게 침묵의 시간에서 우린 무언의 언어를 경청한다.     

작가의 이전글 호크아이 Vol2 소소한 사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