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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Nov 01. 2018

나쁜 친구



 작가의 내면은 작품에 반영된다. 그것은 작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다. 물론 작가의 선호는 있을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얼마만큼 독자에게 드러낼 지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 ‘앙꼬’는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주저 없는 작가 같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그림일기를 친구에게 자랑하곤 했고 이 경험은 다시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이끈다. 실제로 <앙꼬의 그림일기>, <삼십살>은 80권이 넘게 쌓인 그림일기에서 추려 만든 작품이다.

 이 같은 작가의 성향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다루지 않은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열아홉>, <나쁜 친구> 역시 직접적일지는 아닐지라도 작가의 청소년기를 다룬 자전적 성향의 작품이다. <앙꼬의 그림일기>, <삼십살>과 <열아홉>, <나쁜 친구>는 정서, 작화 모두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까맣게 삼켜버린 세계

 <나쁜 친구>는 흑백만화다. 이것은 중요하다. 단순히 색의 결여가 아닌 흑과 백이 작품의 주제와 정서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가정과 학교의 방관으로 사회 밖에 내몰린 정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청소년기는 누군가에게 가능성의 시간이지만 <나쁜 친구>의 아이들에게는 가능성이 차단된 시간이다. 그들은 설사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갈지라도 그 대가는 가혹하며 무엇보다 그 대가의 크고 작음은 그들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쁜친구>의 작화는 짙은 어둠이 눌러앉은 듯 무겁고 답답하다. 이 흑백의 공간은 아이들을 에워싼다. 그리고 주인공 정애는 종국에 어두운 배경에 용해되어 검은 골목으로 사라져버린다.


(좌) 카라바지오-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 (우) 앙꼬- 나쁜 친구

 

 흑과 백이 만든 세계. 하지만 이 공간은 강렬한 명암대비의 ‘카라바지오’ 회화 세계와는 다르다. 카라바지오는 빛을 강조하기 위해 어둠을 사용한다면 <나쁜친구>는 어둠을 강조하기 위해 빛을 사용한다. 그래서 전자는 시각적인 관점에서 빛을 비추는 대상을 찬양하고, 후자는 촉각적인 관점에서 희미한 대상을 에워싼 어둠을 강조한다. 즉 <나쁜 친구>의 명암대비는 빛이 아닌 어둠이, 인물이 아닌 세계가 우위에 있다. 어두운 밤은 금방이라도 인물을 삼켜버릴 것만 같고 그들은 극단적인 명암의 공간에 고립된다.



남겨진 자의 부채감

 <나쁜 친구>는 주인공 진주가 탈선한 친구 정애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주인공 진주의 얼굴이 정애가 사라진 후 정애의 얼굴과 점점 닮아간다. 더욱이 후반부 진주의 긴 얼굴은 정애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이름과 얼굴을 주의 깊게 연결 짓지 않는다면 진주가 누구인지 혼란에 빠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앙꼬 작가는 왜 주인공 진주와 친구 정애의 외모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이 작품이 주인공 진주 즉 남겨진 자의 부채감으로 씌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영의 친구들은 소위 비행 청소년이다. 그들은 담배를 피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유흥업소에서까지 같이 일을 한다. 그럼에도 미영은 결코 그들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 미영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가족은 제 각각의 이유로 불행하지만 그 모습은 어딘가 비슷하게 닮아있다. 부모는 부재하고 아이는 방치돼 있다.

 주인공 미영이 같이 가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애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다. 미영은 그래도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있었다. 설사 그것이 가정교육으로 결코 합리화할 수 없는 폭력이라 할지라도 정애에게는 그 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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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진주는 남겨지고 정애는 떠난다. 어쩌면 진주는 정애처럼 될 수 있었다. 다른 친구의 말처럼 만약 계속 그대로 살았더라면 은행이 아닌 은행 뒷골목 사창가에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반대로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정애가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면 진주처럼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진주가 정애였다면, 정애가 진주였다면.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지는 건 그래서다. .

 

 하지만 이 슬픔은 결국 남겨진 자들의 자기 연민에 가깝다. 진주가 정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결국 그녀가 더 이상 그곳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주는 종국에 정애와 조우하지만 다시 한번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 한다. 무력감이 검은 배경과 함께 무겁게 내려 앉는다. 이 순간 진주와 그 장면을 목격하는 우리는 나쁜 친구가 된다. 나쁜 친구는 그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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