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혁진 Sep 28. 2018

시간을 지키다



 

  <시간을 지키다>는 작가 오사 게렌발의 연작이다. 보통 연작이라 함은 일정한 내적 연관성을 지니면서 연쇄적으로 묶여 있는 작품을 일컫는다. 여기서 오사 게렌발 연작의 공통분모는 작가 ‘자신’이다. 오사 게렌발은 전작 <7층>, <가족의 초상>,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에서 <시간을 지키다>까지 자전적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써내려 간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연스레 던지게 된다. 작가의 언급처럼, 이제 이야기를 할 만큼 다한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작품을 써내려 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멀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어떤 시간을 지켜내려 하는 걸까?     


 오사 게렌발의 작화는 어둡고 두꺼운 윤곽선과 그것이 둘러싼 평평한 면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언뜻 어린 아이의 휘갈긴 낙서같이 보인다. 하지만 서툴게 이어진 이 선은 단순히 숙련의 문제가 아니다. 어린 아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작가는 실제 유년기로 돌아가 자신의 상처를 힘겹게 끌어올린다.

 극적인 제스처, 노한 눈동자, 뚝뚝 떨어지는 눈물. 작가의 고백은 그만큼 긴급하고도 절박하다. 객관적인 작화만으론 이 격렬한 감정을 담아낼 수 없다. 시시각각 요동치는 감정의 물결을 재단하는 순간, 그 감정이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럴 땐 서툴지라도 과잉된 작화가 오히려 적합할 수 있다. 설사 풍부한 세부, 공간적 깊이 같은 요소들을 희생하더라도 짓눌리고 억압된 감정과 생각을 포착하는 것이 보다 중대하다. 거칠게 표출된 작화는 그 자체로 삶에 대한 처절한 고투다.



 <시간을 지키다>의 작화 역시 거칠고 투박하다. 다만 작품 초반부 몇 장면은 극적이진 않을지라도 미묘한 시간의 흔적이 감지된다. 이 장면은 전작과 달리 서술 자아인 주인공이 명확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지나간 삶을 반추하듯 거울을 정면 응시한다. 이 시공간의 선은 차분히 정제되어 있다. 또한 강박적이라 할 만큼 화면을 가득 채웠던 대화나 거친 팬 선 역시 잠시 화면 밖으로 물러서 있다. 단정히 이어진 선 아래는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평온한 내면이 고요히 흐른다. 관조의 시간. 작가의 그 처절했던 시간은 이제 숭고의 세계로 나아간다.


시간, 죽음 그리고 숲

 <시간을 지키다>는 전작의 연장선에 위치한 작품이다. 과거와 대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서사가 동일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간을 지키다>의 서사는 작화의 변화처럼 전작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여전히 과거를 맴돌지만 그 시선은 더 이상 과거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 이 같은 변화가 특별한 건 아니다. 전작들이 과거에 집중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가 단순히 과거의 나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전적 이야기란 필연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현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간을 지키다>의 변화를 주목하는 건 여전히 유효하다. 이전까지 암시적이었던 시간은 구체적인 서사의 형태로 가시화되며 더 나아가 시간의 흐름은 미래에서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제 시간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건 곧 시간을 지키는 일이 된다. 오사 게렌발은, 그래서, 시간과 죽음을 가시화하는 특별한 공간을 창조한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마침내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는 순간 거대한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숲이 펼쳐진다. 이 숲은 태고의 공간처럼 시간이 멈춰 있다. 게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침엽수림 한 편에는,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흔적인 죽음의 사신이 대기하고 있다.



 미지의 검은 숲에서 주인공은 가상의 아버지와 타인의 망령 그리고 사신(死神)과 대화한다. 그는 분노하고 때론 울부짖는다. 하지만 종국엔 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부모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우연히 자신을 낳았을 뿐 혈연 외에 관계를 이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주인공은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인다. 아니 심지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시간이 가는 것이 정말 좋다고 한다. 아팠던 일들이 날마다 조금씩 멀어지니까. 그는 시간이 가는 것이 정말 좋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할 많은 순간을 허락할 테니까. 그는 마침내 가족이라는 아버지라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작가의 이전글 납치사 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