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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Nov 13. 2018

극한 견주



‘만화는 이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기 경험을 맛있게 표현했으며, 이야기를 경쾌하게 표현하여 재미와 대중성을 함께 보여줬다.’ 부천 만화 대상 위원회가 밝힌 <여탕보고서> 의 선정 이유다. 이 짧은 문장엔 마일로 작가 작품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난다. 우선은 대중성. 진부하게 말하자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겁게 볼 수 있는 만화라는 거다. <극한 견주>를 한 번이라도 훑어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좌충우돌하는 강아지 솜이의 모습에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이어 언급되는 또 다른 특징은 ‘만화같이, 만화답게’이다. 사실  만화 같다라는 말은 많은 경우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시선이 비록 만화의 편견에 기인할지라도 단순하고 과장된이라는  의미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세부 묘사를 줄이고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작업은 만화의 장점 즉 만화 고유의 재현 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한 견주>에는 현실 세계에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 넘처나며, 독자는 자연스레 만화를 처음 접한 그때의 즐거움을 떠올린다. 이 순간 ‘만화 같다’는 책망이 아닌 상찬이 된다.



21세기에 명랑만화가 있다면

 다시 <여탕 보고서>의 선정 이유로 돌아가 보자. 선정 이유를 읽다 혹 떠오르는 만화 장르가 있지 않은가? 남녀노소 함께 볼 수 있는 만화, 만화다운 만화. 70~80년대 많은 사랑을 받은 <꺼벙이>, <심술통>,<로봇 찌빠>, <맹꽁이 서당> 같은 명랑만화가 떠오른다. 이들 작품은 한번 보면 잊지 못할 주인공과 일상성에서 오는 잔잔한 웃음을 특징으로 한다.

  <극한 견주> 역시 이러한 명랑 만화의 특성을 공유한다. 사모예드 강아지 ‘솜이’는 이름과 얼굴에서 이미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는 주인공이다. 하얀 솜뭉치 같은 솜이는 한 시도 쉬지 않고 말썽을 부리며 끊임없이 사건을 발생시킨다. 게다가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 또한 현재 개그만화보다 보편적인데 즉 권위를 해체하는 부조리 만화와 달리 일상성에서 오는 웃음을 유발한다. 명랑만화 주인공이 말썽을 부린다 해도 어린이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듯, 강아지 솜이 역시 극한 상황을 만들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측 가능한 일상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좌) 명랑만화, 요철 발명왕, (우) 극한 견주



 물론 <극한 견주>가 명랑만화와 차별되는 지점이 존재하긴 한다. 시대의 산물인 명랑만화의 경우 70-80년대 ‘도시’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히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과 주택과 주택을 이어주는 골목은 장난꾸러기 주인공의 주요 무대다.

 하지만 <극한 견주>의 일상은 이와는 다르다. 간략한 배경이 암시하듯 공간은 작품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전작 <여탕 보고서>의 경우 목욕탕이라는 장소가 부각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대성 그 자체를 재현하는 공간이라기보다 독특한 소재와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에 가깝다. 이 같은 성향은 <극한 견주>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데,배경은 많은 경우 비어 있으며 대신 소재인 반려동물이 전경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일상성은 여전히 마일로 작가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시대 일상의 재현 방식이 명랑만화처럼 공간을 재현하지 않을지라도 대신 목욕탕, 반려 동물 같은 동시대의 풍속을 담아낸다. 그 재현은 생의 주기를 포함하는 총체적 일상이라기보다 개인의 경험으로 분화된 일상에 가깝다.



카툰화의 보편성

 여러 공통점을 나열했지만 <무한 견주>와 명랑만화와의 가장 큰 공통분모는 생략, 과장, 변형이 두드러지는 카툰화된 작화다. 두 만화 모두 2-3등신의 데포르메 시킨 그림체와 과장된 감정표현과 행동을 공유한다. 만화의 캐릭터들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시라도 가만있질 못한다.

 특히 <극한 견주>의 경우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 그것을 과장되게 표현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때 복잡한 선과 명암은 필요치 않다. 오히려 단순화된 작화인 카툰화가 감정이입을 더욱 용이하게 한다. 가령 무민과 스누피같이 정감 넘치는 카툰 캐릭터를 생각해보자. 이 간결한 선의 존재는 유년기뿐 아니라 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카툰화의 특성은 단순히 감정이입에 머물지 않는다. 보다 근원적으로 보편성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  카툰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정의해보자. 카툰화란 핵심 의미가 나올 때까지 주어진 형상을 벗겨내는 작업으로 일종의 추상화(化)로 이해할 수 있다. 카툰화가 강한 형태일수록 그것은 본편적 존재가 되는데, 예를 들어 하나의 원, 두 개의 점을 가진 얼굴 형태는 모든 인간의 얼굴이 된다.


  카툰화의 보편성은, 그래서, <극한 견주>의 재미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극한 견주>가 사랑 받는 이유는 우선 주인공 솜이의 귀엽고도 얄망스러운 모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귀여운 캐릭터만으로는 작품의 즐거움을 온전히 설명할 순 없다.

 그렇다면 즐거움은 또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독자 감상평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독자들은 주인공 봄이가 자신의 개와 닮았다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 많은 개들이 사모예드 종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솜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강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따라서 <극한견주> 솜이 캐릭터는 작가가 키우는 개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카툰화를 거친 솜이는 감정과 행동이 기호화된 개의 원형이기도 하다. 커다란 침을 뚝뚝 흘리고, 여러 개의 다리를 미친듯이 퍼덕거리는 봄이의 모습은 개를 키우지 않은 사람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결국 <극한 견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실제 존재하는 사모예드 봄이의 개성뿐만 아니라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개의 모습까지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같이 또는 만화답다라는 건 이런 의미다. 마일로 작가의 손을 거치면 , 세계는 카툰이 된다. 심지어 금남의 공간 여탕조차도 보편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이 세계는 명랑함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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