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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Dec 14. 2018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 세계

<산책>, <에도 산책>, <우연한 산보>



 다니구치 지로는 성실한 작가다. 1971년 데뷔 이래 사망직전 2015년까지 쉼 없이 작업을 이어왔다. 게다가 하나의 장르에 머물지않고 동물, 음식, 미술, 역사, 하드보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다니구치 지로의 세계를 다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전 작품를 무리하게 다루기 보다, 특정 작품을 우선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산책>, <에도 산책>, <우연한 산보> 와 같은 산책 연작처럼 말이다.

  사실 산책은 인기있는 소재가 아니다. 걷는다는 단조로운 행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르의 희소성과 별개로 산책은 인간의 존재론적  행위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걸음걸이를 가진다. 그리고 그 발걸음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풍경이 묻어 있다. 그러면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다니구치 지로의 눈에 비친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풍경에 스며들다

  다니구치 지로는 <산책>에서 감정을 표현할 때 글이 아닌 배경으로 상황과 분위기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산책의 주체는 인간이지만 궁극적으로 산책이란 풍경의 일부가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산책 만화인 <산책>은 달리말해 풍경에 관한 만화라 할 수있다. 건물과 나무와 같은 세밀한 선으로 이어진  계열체가  풍경으로 숨 막히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 풍경은 어딘가 기이하다. 정교하게 재현됐음에도 현실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느낌이다. 선은 형태에 예속되기보다 독자적 생명을 가지며 여기에 음영까지 비워지면서 세계는 생경해진다. 게다가 공간 속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풍경은 한층 더 만개하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주인공이 현실감이 결여돼 보이는 건 심지어 꿈 속 어딘가를 헤매듯 보이는 건 그래서다.  <산책>의 풍경은 이렇게 현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풍경이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다는 말은 아니다. 산책 할 때의 내밀한 경험을 떠올려보자. 풍경이 스며들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세상과 하나가 된다.


<산책>


 리얼리즘에서 초현실주의의 공간으로 이동은  일본 에도시대가 배경인 <에도 산책>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에서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 <산책>이 정교한 배경 묘사를 통해 현실을 넘어선다면, <에도 산책>은 현실과 환상을 이어주는 매개체를 통해 현실을 초월한다. 그 매개체는 정처 없이 떠도는 시인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강변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화가가 될 수도 있다. 시인이 하이쿠 시구를 나지막이 읊을 때, 화가가 반딧불이 가득한 밤하늘로 이끌 때, 인파로 북적거리던 속세는 태고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물론 변화란 앞서 공간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체험공간의 중심인 인간 역시 변화하는데, 주인공의 시점이 비인간적 존재 즉 잠자리, 고양이, 거북이의 시점과 동일화되면서 이전까지 인간이 볼 수 없던 에도의 풍경을 펼쳐낸다. 탁 트인 부감 장면이 펼치며 어느새 골목과 골목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그러다 다시 깊은 강 속으로 하염없이 침착해 간다.


<에도 산책>


거리의 남성 산책자, 플라뇌르

 <산책>, <에도 산책>이 시적이라면 이어지는 작품 <우연한 산보>는 보다 심리적이다. <우연한 산보>의 칸은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연달아 이어진 각각의 칸들은 다시 공간을 연다. 이러한 칸의 연쇄는 물질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어지러이 얽힌 골목길이 된다. 칸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린 주인공과 함께 골목길 한켠을 맴돈다.

  이 때 주인공이 걷는 공간은 수직적으로 개발된 도시가 아니다. 쇼와 시대 모습이 남아 있는 주택, 연식이 있어 보이는 가게같이, 그는 오랜 시간 속에 살아남은 하지만 이조차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골목 어딘가를 서성거린다. 그리고 시대에 먹히지 않으려 어깨를 기댄 이 낡은 건물의 정경에는 에디슨 전구 불빛 같은 음영이 은은히 배어 있다.

 지나간 심지어 아직 도달하지 않은 과거를 향한 동경.  주인공은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처마와 얽히고설킨 골목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한편으론 자신의 세대가 50년 뒤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지를 안타까워한다.


<우연한 산보>


  공간의 소실점은 점점 주인공의 과거와 내면으로 수렴된다. 사실 이 같은 여정은 <우연한 산보>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수하기보다 차라리 보편적인데, 산책을 다룬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걷는 이의 과거를 불러내며 그래서 이야기의 목적지는 궁극적으로 걷는 이의 내면이 된다. 작가가 강조하듯 <우연한 산보>는 보편적 이야기다.

 하지만 산책이라는 경험을 넘어 깊숙한 층위로 들어선다면 다시 말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을 펼치는 존재에 물음을 던진다면 <우연한 산보>는 과연 보편적인 이야기 일까?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남성의 이야기에 가깝다. 자칫 이 말은 동어반복처럼 들린다. 주인공은 남성이며 작가 역시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건, ‘산책 이야기’ 자체에 관해 논의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산책 이야기는 보편적인가?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 또는 ‘아니다’다. 산책 이야기는 분명 산책 경험과 내면 회귀를 다룬 보편적인 장르다. 하지만 한편으로 산책 이야기는 많은 경우 남성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장르이기도 하다. 장 자크 루소, 키에르케고르, 헨리 데이브드 소로 등 남성 작가가 언급될 때 여성 작가를 찾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다니구치 지로의 또 다른 작품 <고독한 미식가>를 살펴보자. <고독한 미식가>는 음식을 먹는다는 명확한 목적을 제외하면 산책만화와 닮아 있다.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는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주시한다. 여기서 작가는 편집자의 요구로 주인공을 ‘하드보일드 탐정’ 스타일로 그리는데, 이 때 이러한 캐릭터의 특성은  산책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드보일드 장르가 남성성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특히 탐정이라는 성향은  ‘플라뇌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라뇌르는 무엇인가? 플라뇌르는 보통 거리의 산책자를 뜻하지만 이것만으론 설명이 충분치 못하다. 가령 많은 글 속에선 플라뇌르는 타인을 초연하게 관찰하는 탐정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발터 베야민’의 경우 플라뇌르를 산책, 여가, 관찰, 군중, 소외와 연결시킨다. 이 같이 플라뇌르는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되지만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특성을 공유한다. 어느 정도 재산과 세련된 감수성이 있고 가정생활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남성1).


  이 지점에서  우린 다음과 같은 추론을 끌어 낼 수 있다. 산책이라는 행위와 산책을 재현하는 방식은 ‘남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여성 플라뇌르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한 페미니스트 학자의 주장 역시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풍경을 플라뇌르의 시각으로 재현한 인상주의 경우, 여성 화가는 남성화가와 달리 여성에 대한 통념으로 다양한 장소를 소재로 택하지 못한다.


<카페 테라스의 여인들, 저녁>, 에드가 드가, 1877년, 관람자를 탐정 플라뇌르로 명백히 규정된 작품

 

 다시 <우연한 산보>로 돌아가 보자. <우연한 산보>의 주인공 ‘우에노하라 조지’는 비록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 정도로 하드보일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플라뇌르 즉 남성 산책자인 인물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주인공 우헤노라 조지를 통해 인상주의 남성 화가가 그랬듯,  남성의 욕망을 보편적 주제에 투영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욕망들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용해시킨다.

 결국 주인공이 우연히 들어섰다고 주장되는 그 골목길은 남성적 관점에서 정교하게 배치되고 구성된 공간인 것이다. 공간은 결코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우연한 산보>의 남성 주인공의 궤적을 따라가보자. 주인공은 편의점에서 자신과 달리 여전히 밴드 활동을 하는 친구를 만나 자기 연민에 빠지고, 헌책방에서는 유년 시절 읽은 동화책을 통해 삶의 무게를 반추한다. 특히 학창시절 축제같다는 히피축제는 그 자체로 남성의 추억과 감성을 집약한 공간처럼 보인다. 가랑비는 꿈결같이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중년 사내들은 자유를 만끽한다. 어지러이 얽힌 골목길 마침내  다다른 그 곳엔 중년 남성의 고독한 내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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