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혁진 Apr 08. 2019

화의 방향

지금 칸이 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은 SNS에서 시작된다. 남동생 ‘막내’가 누나 ‘둘째’의 사진을 SNS에 올려 얼굴을 평가하다 발각된 것이다. 왜 모든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나? 이 사건은 단순한 10대의 일탈이 아니다.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첨예하게 드러내는 시대의 징후다. 주인공 ‘첫째’는 남동생만큼은 여성혐오를 하지 않는 남성이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막내는 결국 한국남자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막내에게 던진 질문,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동시대의 곤혹스러운 어떤 감정을 반영한다. 10대 남성마저 여성혐오에 적극 가담한다면 우린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주인공은 절박하고도 긴급하다. 출구가 차단된 폐쇄회로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답해야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 보다 더 긴급한 질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 묻는다. 이 화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작품 전체를 지배할 근본적 물음을 던진 것이다. 주인공 첫째는 화의 근원을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화는 어디에서 시작할까? 화는 어느 방향으로 흐를까? <화의 방향>은 이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주인공의 의식을 선의 이미지로 형상화 한다. 그러고는 이 어지러이 얽힌 선들은 의식의 저부를 향해 흐르며 억압된 주인공의 기억과 생각을 차례로 복원한다. 외모에 대한 시선, 딸에 대한 차별 그리고 야만적인 학교 폭력. 사실 이와 같은 경험은 여성 서사에서 특별한 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화의 방향>이 타 작품과 구별되는 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억압과 차별을 서늘해지는 어떤 지점까지 밀고나가는 힘에 있다.  특히 학교 폭력 에피소드의 경우 기존 웹툰에서 쉽사리 볼 수 없던 문제적 순간을 포착한다.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많은 경우 일진을 미화하거나 학원물 장르의 관습에 포섭된다. 물론 학교 폭력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 없진 않았지만 이들 역시 청소년을 보편적 남성으로 등치하는 근본적 한계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화의 방향>은 학교 폭력에서 지워진 여성을 재현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차별과 억압을 깊이 있게 파고든다. 가령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들여다보자. 피해자는 종종 폭력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곤 하는데 주인공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때의 죄책감은 젠더 문제와 결합되어 남학생이 경험하지 않을 층위의 감정으로까지 확산된다.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자책한다. 승부욕을 보여도 안 되고 밥을 많이 먹어도 안 된다. 예쁘게 보여야 하지만 단 예쁘게 꾸민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되묻는다.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세어 본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인간과 세계의 추상, 칸

 <화의 방향>의 남매는 각자 고유의 칸을 가진다. 첫째는 원, 둘째는 직사각형, 막내는 삼각형. 이 기하학적 도형의 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화의 방향>의 칸은 기본적으로 재현의 공간이다. 그리고 칸의 즉물적 관점에서, 명확히 구분되는 칸의 모양은 각 인물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다만 이 같은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한데 <화의 방향>의 칸을 이해하기 위해선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좀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은 보통 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래서 정체성은 외부 세계와 상호 작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게다가 무의식 측면에서 정체성은 타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욕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욕망을 구성한다. 13살의 주인공이 욕먹고 미움 받는 걸 두려워하며 가부장제 질서를 내면화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주인공의 정체성은 학교, 교복 방향으로 추상화되어 종국엔 칸이 되는 가부장제와 명확히 분리하기란 쉽지 않다. 주인공의 정체성과 가부장제의 담론은 같은 칸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화의 방향>에서 칸이란, 개인의 정체성이며 동시에 주인공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틀이다.

 


 <화의 방향>의 인물들은 이렇게 가부장제 구조 앞에 무력한 개인이 된다. 그리고 이 같은 우울한 전망 아래 작가는 칸의 탐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사소통이라는 기획을 통해 가부장제를 돌파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다. 가족의 대화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들은 상호주관적 주체라기보다 차라리 고립된 주체다. 이때의 고립이란 심리적인 것을 넘어 물리적인데 그들은 말 그대로 좁은 직사각형 칸 안에 갇힌다. 대화는 각자의 칸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설사 벗어난다 해도 상대방의 말풍선에 의해 가려져 버린다. 

 무엇보다 <할 수 있는 것> 에피소드는 칸의 미학을 통해 소통 불가능성을 또렷이 보여준다. 주인공은 폭력을 당하고 어머니에게 위로 받길 원하지만 어머니는 주인공을 외면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백남준의 <TV 부처>와 같은 구도를 취하는데, 주인공은 조각처럼 굳어있고 어머니는 이차원 스크린의 칸이 된다. 그들은 다른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영상의 창이라는 은유가 암시하듯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렇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걸까? 첫째의 원과 둘째의 사각형이 거듭 교차하며 칸의 궤적을 만들다 하나로 겹쳐진다. 하지만 원과 사각형의 여집합은 소통의 가능성을 여전히 확실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첫째의 칸과 막내의 칸이 3차원 입방체가 되어 마침내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만나지만 다시 각자의 칸으로 분리되는 장면에선 음울한 예감만을 드리울 뿐이다. 이러한 비관적 태도는 패배주의로의 도피를 의미할까? 아니다. 가부장제 체제 내에서 전복적인 합의를 도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섣부른 합의는 갈등을 은폐하고 억압할 뿐이다. 주인공은 멈출 수 없다. 자신의 질문을 더욱 밀고 가기 위해, 현실의 좌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기 위해 화의 방향을 계속 따라가길 택한다.     


하강하는 페이지, 유동하는 의식 

 출판 만화에서 칸의 탐구에 전착해온 란탄 작가가 <화의 방향>에서 본격적인 웹툰을 시도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웹툰이라는 무한 캔버스에서 일련의 칸들은 어떤 궤적을 그려 낼까? <화의 방향>에서 칸은 파편화되어 있다. 칸은 다음 칸으로 이어지기를 거듭 주저한다. 마치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구조 앞에 분리된 개인처럼 말이다. 그래서 각각의 칸들이 관계를 맺는 것도 폐쇠회로 같은 가부장제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모두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칸과 인물의 파편화된 조각들은 하강하는 페이지에 의해 연결된다. 앞서 선의 이미지가 사건과 기억을 이어준다 했는데, 이러한 선의 은유를 확장하면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페이지이며 더 나아가 주인공을 넘어선 작가의 의식이다. 페이지라는 유체는 분절된 칸을 봉합하고 사건과 상념의 흐름을 만들며 서사의 중심축 역할을 한다. 이제 <화의 방향>은 유동하는 의식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하강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칸은 부유한다. 주인공이 도달할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우린 그것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