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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Apr 09. 2019

페이션스

 



 이미 대니얼 클로즈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페이션스> 에 당황할지 모른다. 판형은 커지고 색상은 강렬하다. 게다가 표지를 넘기면 칸의 크기가 이전과 달리 과감히 확대된다. 가령 아내 ‘페이션스’가 주인공 ‘잭 발로’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페이지는 두 개의 커다란 칸으로 분할된다. 두 사람의 모습은 각각 위, 아래 칸에  담기는데, 이때의 클로즈업은 형상의 존재감을 전면으로 밀어내며 우리의 시선을 압도한다.

 사실 이 같은 크기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소도시의 지지부진한 일상을 다룬 전작과 달리 <페이션스>는 거대한 시공간을 다룬 SF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든다. 확장된 세계, 변화된 장르 안에서 대니얼 클로즈의 특유의 냉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페이션스>의 시작은 아내 ‘페이션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후 주인공 ‘잭 발로’는 아내의 살인을 밝히려 애쓰며 급기야 시간 여행을 통해 아내의 죽음을 막으려 한다. 이 같이 <페이션스>는 전작과는 현저히 대비되는 SF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는 금세 대니얼 클로즈의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두 개 이상의 작화와 장르를 혼합하는 연출은 <페이션스>에서 여전히 반복된다. 냉소적인 일상 이야기에서부터 범죄자를 쫒는 하드보일드 장르와 시간 여행을 하는 SF 장르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페이션스>주인공은  <고스트 월드>, <아이스 헤이번>, <윌슨>의 냉소적 주인공과 닮아 있다. 그들은 현실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며 도시를 정처 없이 떠돈다. 잭 발로 역시 그렇다. 아내와 일상을 함께 보낼 때, 범인을 잡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할 때 그리고 현재가 아닌 다른 시간 층에서 부유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같은 유사성에도  <페이션스> 주인공 잭발로는 대니얼 클로즈 주인공의 계보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인물이다.  전작 주인공은 많은 경우 작품 결말부에서 얼어붙은 유령의 도시를 탈출한다. 이 경우 이사, 졸업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공통적으로 무대 막이 내려지면 서둘러 세계를 떠난다. 잭 발로의 경우도 자신의 시공간에서 이탈한다는 점에선 동일한 경로를 따르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탈출 시기가 작품 결말이 아닌 작품 초반이라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이전까진 주인공이 떠나는 순간만을 목격한 채 책을 덮었다면  <페이션스>에서는 책장을 넘기며 다음 올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즉 <페이션스>는 그동안 전작들이 멈춰 섰던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주인공의 이 행보에는, 시공간을 끊임없이 이동하며 아내의 죽음을 막으려는 이 처절한 몸부림에는 냉소 너머 무언가가 있다.



필연으로부터의 자유

 본격적으로 <페이션스>의 시간여행을 따라가 보자. 2029년의 잭 발로는 아내의 죽음을 막기 위해 2006년의 시간으로 이동한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아내의 전 애인 ‘애덤’을 아내로부터 때어놓기 위해서다. 이것은 뭔가 합리적이지 않다. 살인이 발생한 2012년이 아닌 2006년을 택했기 때문이다. 살인을 막고 싶다면 사건 당시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심지어 애덤은 범인인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잭 발로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이후 잭 발로의 행위 더 나아가 작품 전체를 이해하게 만들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우연히 떨어트린 신분증을 과거의 아내가 발견하며 이것은 이후 두 사람이 결혼 계기가 된다. 주인공은 자신과 아내의 운명을 변화 시킬 수 있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예정된 운명을 따르고 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페이션스>의 세계에서, 자기 의지대로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이것은 주인공의 의지와 무관하게 1985년으로 시간이동 할 때 보다 분명해진다. 그는 애덤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있음에도 이를 시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운명에 예속된 몇 번의 경험을 반복하고 나서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심지어 가장 멍청한 헛짓거리조차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얼어붙은 건물과 마네킹같은 인물들로 이뤄진 데니얼 클로즈의 세계는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가 된다. 세계는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꼭두각시 쇼의 무대라는 개념이 연출되는 것이다1). 그래서 우린 이 지점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운명에 속박된 존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이 같은 자유의지의 부정은 윤리적 문제에 심각한 난점을 제기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 없으며 더 나아가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살아가야 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인공 잭발로는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응대할까? 이전 작품처럼 냉소적으로.  아니다. 이때 잭발로의 선택은 흥미로운데, 그것은 냉소적이라는 작품 평가에 대한 작가의 적극적인 해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주장한다. '등장인물들이 그들 자신이기를 원하고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원할 뿐, 그들을 내 마음대로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그래서일까. 잭 발로는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대면한 후에도 운명과 대결하길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 주인공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뜨거운 열정으로 시간여행에 뛰어든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도 기어코 예정된 길을 따라 아내를 구한다.  이것이이 상황 잭발로에게 허락된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다. 마치 필연을 자유로 전환한  <에티카>의 스피노자처럼 말이다. 설사 행위의 숨겨진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 실제 자유를 증대시키지 않을지라도, 어떤 깊은 뜻에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2).


 누군가에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고 불만족스러운 대답일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주인공 잭발로는 운명이 압도하는 세계에서 인간에게 얼마 남지 않은 가능성을 찾아 실존의 지도를 그린다는 점이다. <페이션스>는 단순히 판형이나 장르만 변화된 작품이 아니다.  냉소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한 건 이런 의미다.

 이제 <페이션스>의 점증되는 형이상학적 인식은 자아가 해체돼 원자로 환원되는 환상의 이미지 형태가 되어 페이지 너머 세계로 뻗어간다. 잭 발로 말한다. ‘더욱 더 많은 것을 보면서, 타고 남은 내 존재의 잔불은 영겁의 무한을 향해 더욱더 멀리 흘러가 버린다. 보면 볼수록 모든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단 하나의 확고한 진실을 영원토록 긍정한다’라고. 대니 클로즈의 냉소의 세계는가 헤아릴 수 없는 무한의 우주로까지 확장된다.



1)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초현실주의

2) 브라이언 매기, 위대한 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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