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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Jun 16. 2019

에드몽 보두앵의 <달리>


 살바도르 달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 모른다 해도 한 번쯤은 그의 작품을 스쳐 갔을지 모른다. 불타는 기린, 서랍 달린 인간 그리고 녹아 흘러내리는 시계. 그렇다. 살바도르 달리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그린 초현실주의 화가다.

 이 화가가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자신과 초현실주의 세계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극단전인 나르시스트이면서 동시에 소심한 남자였다. 또한 편집광적 예술가였으면서 한편으로는 ‘아미다 돌라르’ 즉 달러에 굶주린 자라 불릴 만큼 속물적인 사람이었다. 이 압도적인 모순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달리는 오히려 이 분열의 경계에서 유희하며 종국엔 초현실주의 세계 자체가 된다.     


자동 기술법에서 편집증적 비평으로의 이행

 에드몽 보두앵의 <달리>는 2012년 퐁피두 센터의 달리 회고전을 기념해 만든 그래픽노블이다. 사실 예술가 달리의 삶을 재현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는 천재와 광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나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라고 말한 달리의 말처럼, 그를 그린다는 것은 곧 무의식 또는 초현실주의 세계를 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행히 보두앵에게 있어 초현실주의는 낯설지 않다. 붓을 사용하는 그의 드로잉은 초현실주의 표현 수단인 ‘자동기술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자동기술법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반사적으로 종이에 선을 그어 대상을 실루엣처럼 모사하는 방법이다. 보두앵 역시 서예를 하듯 선을 유려하면서도 대담하게 흘려보내며, 단지 몇 개의 선만으로 사물의 본질을 포착한다. 그것은 설사 의식적으로 제어된 것일지라도, 선이 움직이는 그 순간만큼은 예측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같은 특성은 전작 <여행>에서 잘 나타는데, 자유롭게 흐르는 선은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의식을 따라 흐르다 그를 둘러싼 세계와 뒤섞이며 초현실적 세계를 펼쳐낸다.



 하지만 자동기술법적 드로잉만으로는 달리의 삶과 작품을 온전히 그려낼 순 없다. 달리는 자동기술법을 넘어 비합리적 이미지를 정밀히 재현하는 ‘편집증적 비평’ 방식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편집증적 비평이란 무의식의 비합리적 이미지를 격정적인 정확성으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보두앵은 ‘나는 편집증적 비평을 사용하여 달리의 무의식 상태를 그림으로 표현하려 한다’라며 이 초현실적 방법론을 적극 도입한다. 유동하는 선은 이전과 달리 정적으로 변한다. 선은 무의식적 이미지를 정밀하게 물질화하며, 거칠게 문지른 붓 자국은 형태에 무게감을 더한다. 이렇게 <달리>는 자동기술법으로 무의식 세계를 드로잉하며 거기에 더해 편집증적 비평으로 상상의 이미지에 견고한 실체를 부여한다.      


달리, 보두앵 무의식의 세계에서 만나다

 보두앵은 달리의 초현실적 세계를 어떻게 재현할까?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말풍선이다. 특히 특정 말풍선 대사의 경우 열 줄이 넘어갈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말풍선의 대사가 구어체란 걸 고려한다면 <달리>의 대사는 가독성이 좋지 않다. 평전으로서 많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함일까?

 <달리>처럼 긴 대사의 작품  <브라보, 나의 인생>와 비교해보자. <브라보, 나의 인생>은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멕시코 후아레스 주민의 이야기다.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긴급함은 필연적으로 긴 대사와 독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달리>의 경우, 숨 막힐 정도로 나열된 긴 대사는 달리의 편집증적 성격을 은유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쉴 세 없이 수많은 생각을 쏟아내고 동시에 현실 너머 무의식 세계를 주시하는 달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게다가 <달리>의 말풍선은 긴 대사뿐만 아니라 초현실적인 이미지까지 포함하면서 그 공간은 급격하게 넓어진다. 그래서 말풍선은 때론 페이지 전체를 채우며 심지어 옆 페이지로까지 확장된다. 이때 말풍선은 말풍선이라기보다 차라리 칸 또는 페이지에 보다 가까운데 그 결과 각 영역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마치 무의식과 의식,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달리의 세계처럼 말이다.



 말풍선, 칸, 페이지의 경계가 소멸된 그 지점엔 도대체 무엇이 존재할까? 그곳에는 머나먼 지평선이 펼쳐진 꿈의 무대가 떠오른다. <달리>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지질학적 환상을 통해 만들어진 바로 그 추상적 공간 말이다. 이 무한의 불모지에서, 여러 형태로 변모하는 화자는 존재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며 대화만으로 겨우 그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면 화자를 대신해 장면 전체를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달리의 작품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단순한 모사가 아니다. 갈라, 코뿔소, 늘어진 시계, 만종의 부부와 같은 달리의 무의식 원형을 잘라내 콜라주처럼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의 결합은 우연히 혹은 인위적으로 계속 이어갈 때마다 달리와의 동일성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이것은 달리의 그림이면서 동시에 달리의 그림이 아니다. 작품 속 화자가 보두앵이 해석한 <크리스토포 콜럼버스의 꿈>을 보고 달리에 대한 배반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보두앵은, 작가가 고백했듯 달리를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거장에 휘둘리기보다 오히려 그를 자신 쪽으로 끌고 간다. <달리>는 보두앵이 해석한 달리 평전이다. 하지만 평전이라는 일반적 정의로는 이 작품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을 것 같다.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달리와 보두앵. 이 두사람은 비평적 편집증으로 무의식 공간에 조우해 <달리>를 함께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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