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스타>는 간판스타에서 내려올 때
이희재의 <간판스타> 표지를 보자. 찬사의 향연이다. ‘만화평론가가 선정한 해방 이후 좋은 우리 만화 1위’, ‘한국 만화의 최고의 리얼리스트‘ 좀처럼 보기 힘든 찬사가 연달아 이어진다. 이 찬사는 어딘가 이상하다. 특히 ’90년 만화사에 처음으로 몽상의 안개를 걷어내고 만화를 예술의 지위로 단박에 올려놓은‘이라는 평가에선 남성 평론가들의 어떤 편향마저 감지된다. 그리고 <악동이>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설명에 이르러서는 이 추측은 확신이 된다. 많은 이들은 주인공 악동이가 골목대장 왕남이를 물리친 이야기를 군부독재에 억눌린 현실의 은유라 말한다.
물론 이 해석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악동이>를 <간판스타>와 동일한 계보에 욱여 놓는 것은 과연 온당한 일일까. 더 나아가 리얼리즘 만화의 과도한 찬사는 한편으로 이희재 작품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 만화를 지워버린 게 아닐까. 진정으로 이희재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간판스타>는 간판스타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
<간판스타>의 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1980년대는 군부독재와 분단체제로 인해 민주화, 통일, 노동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으며 예술 분야에서도 사회현실의 참여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만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86년 <외대 학보>와 <연세>에서는 각각 ‘만화의 민중적, 민족적 형식은 가능한가?’, ‘한국만화의 역사와 만화 대중화 운동론’을 통해 만화의 사회적 참여에 대해 적극 논의한다. 게다가 <만화광장>, <주간만화>, <매주만화>등 만화잡지의 잇따른 창간으로 다양한 작품을 연재할 기회가 확대되는데, 이때 이희재 작가는 <간판스타>에서 수록될 단편을 연달아 내놓으며 리얼리즘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 같이 <간판스타>는 사회 현실과 조응하며 만화의 영역을 확장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럼에도 <간판스타>를 현시점에 다시 읽는다면, 몇몇 부분의 보편적인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1980년 후반 어딘가에 정체된 인상을 받게 된다. 가령 <간판스타>의 많은 인물들은 다만 거기에 존재한다기보다 사회적 주제를 지지하기 위해 도입된다. <간판스타>, <새벽길>의 인물들은 작품을 보지 않더라도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다분히 전형적이다. 특히 <새벽길>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내재적으로 전형성과 관계하는데, 환경미화원 부부의 모습은 어떠한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인텔리계층의 시혜적 관점으로 재구성된다. 또한 인물의 전형성은 작위적인 서사로 이어지면서 <민들레>의 경우 개와 민들레로 대립되는 상징과 신동엽의 <봄의 소식>의 삽입으로 진부한 도덕적 우화가 된다.
그렇다면 <간판스타>는 단순히 8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다. <간판스타>은 여러 결함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결정적 순간 주인공의 깊은 눈을 들여 볼 때, 우린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오해해선 안 될 사실이 있다.이때의 감정은 리얼리즘에서 온 것이 아니다. 아니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바로 애써 외면한 어린이 만화라는 토양에서 배양된 것이다. 누군가는 어린이 만화가 현실적이지 않으며 순진하다고 폄하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비판을 달리 말하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어떤 만화가 어린이 만화만큼 확고히 밀고나갈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로 이희재 작품은 어떠한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기어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믿고 싶게 한다. 작가의 소박한 품성과 어린이 만화의 낙관성이 엮어내는 이 선함은 냉정한 현실을 재현한 리얼리즘을 넘어선다. <간판스타>의 작품 편차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에 한 없이 가까워질 땐 진실 되고 호소력이 있는 작품으로 나아가지만 반대로 이 감정에서 한 없이 멀어질 땐 상투적이고 밋밋한 작품으로 밀려간다.
이어지는 사람들과 열린 공동체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이희재의 작품의 모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레 열린 공동체의 정서로 이어진다. <악동이>, <나 어릴적에>, <저 하늘에서도 슬픔이> 등과 같은 작품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그 모습은 <새벽길>에서 환경미화원 부인을 숨 막힐 정도로 에워싸는 기자의 모습과는 동일하지 않다. 공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채워지는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이어지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은 분리된 존재가 아닌 더불어 사는 존재다. 그래서 이희재 작품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길게 이어지거나 또는 커다란 원을 이룬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하나로 어우러지며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지 않는 극을 연출한다.
이 어울림의 풍경은 마치 민중의 생명력과 솟아나는 신명을 담아낸 80년대 민중미술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작가의 80년대 등단 시기를 고려하면, 당시의 대중적 예술 ‘민중미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건 오히려 필연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근작 <낮은 풍경>에서는 어떤 작품보다 분명히 민중미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신명의 춤판’, ‘자유의 난장’, ‘알파만파의 대동굿판’와 같은 어휘를 사용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긴 직사각형 판형과 펼쳐지는 페이지라는 물리적 형태로 먼저 다가온다. 그리고 가로로 길게 뻗은 공간엔 자유를 향한 더 많은 가능성을 얻게 되며 그 결과 인간의 물결이 펼쳐진다. 심지어 고정돼 움직일 수 없는 무생물인 건물조차도 이 같은 흐름에 동참하려 한다.
사진의 경우 짧은 한 순간과 하나의 시선만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낮은 풍경>은 비록 원안대로 병풍식 화첩처럼 구성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거대한 수평의 파노라마 공간은 사진이 포착하지 못할 현실을 담아낸다. <낮은 풍경>의 풍경은 쉼 없이 이어진다. 커다란 공간은 우리가 그 곳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일깨우며, 길게 늘여진 공간은 우리를 풍경 곳곳으로 돌아다니게 만든다. 이때 마주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동등하고 그 안에서 각자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는다. 하나의 물결을 이루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의 물결로 환원되는 일은 없다.
어린이 만화와 리얼리즘 만화의 공존
논의를 지지부진하게 이어왔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질문에 답할 차례다. <간판스타>가 아닌 어떤 다른 작품이 간판스타가 될 수 있을까? <악동이>가 될 수 있고 아니면 <나의 오렌지 나무>, <저 하늘에도 슬픔이>, <나의 옛동네>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이 더 나은지 선뜻 말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개인적으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택하고 싶다. 이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보다 흥미롭기 때문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는 이희재의 작품 중 이질적인 요소가 유독 두드러지게 공존하는 작품이다.
우선 작화의 측면에서 보면 어린이 만화, 리얼리즘 만화 같은 다양한 작화가 혼재돼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어린이 만화가 품고 있는 소박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발휘하듯 나무, 막대기, 실과 단추의 이미지에 별다른 기교 없이도 충만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렇게 어린이 만화 그림체는 어린이의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세계 즉 이희재의 세계를 보증한다. 하지만 이때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는 어린이 만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 즉 리얼리즘 만화가 틈입했다는 점이다.
이때 우리는 이 예외적인 주제와 이미지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모두는 아닐지라도 때론 어린이만화에서 보여주지 않을 현실 일부를 드러내고 만다. 이것이 바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 리얼리즘이 등장한 이유다. 만약 리얼리즘 작화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현실의 복잡성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제제 부모의 얼굴에 새겨진 고단함, 다시 말해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 삶의 무게를 말이다.
그렇다면 어린이 만화와 리얼리즘 만화라는 이질적인 결합은 왜 발생한 걸까? 그것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J.M. 바스콘셀로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이다. 원작은 성장소설의 형식을 따르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에 대한 방조와 학대의 이야기다. 이 주제론적 체계는 역행은 아닐지라도 어린이 만화 세계에 통합될 수 없는 어떤 분절을 발생시킨다. 구체적으로 이희재 작품에서 ‘가정’을 주목해보자. 그것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아이들을 포용하고 더 나아가 이희재 세계를 유지케 하는 특권적 공간이다. 심지어 <저 하늘에도 슬픔이>처럼 고난의 근원이라 할지라도 그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주인공 제제의 시종일관 밝고 씩씩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믿음은 무너진다. 야만적일정도의 폭력이 행해지며, 무엇보다 라임오렌지 나무 ‘밍기뉴’는 결국 꿈 속의 세계를 떠나 현실과 고통의 세계로 떠나가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어린이 만화에서, 이희재의 만화에서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될 사건이다. 그래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어린이 만화로부터 일탈하려는 원작의 세부가 드러날 때, 이 과잉된 세부는 어떠한 빛도 허용치 않는 짙은 어둠으로 물들여 질 수밖에 없다.
물론 작가는 원작이 만들어낸 균열을 어떻게든 다시 회복하려 한다. 달리 말하면 리얼리즘이 만든 균열을 어린이 만화로 다시 봉합하려 한다. 작가는 ‘네가 무슨 짓을 했나 잘봐! 이 잔인한 녀석들’이라는 막내 누나의 목소리를 빌어 어른의 폭력에 분노하고 커다란 원을 이룬 마을주민들은 과잉될 정도로 제제를 위로하지만, 결국엔 리얼리즘 작화로 그려진 아버지의 모습이 더 이상 어린이 만화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실감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마지막 장면은 이희재의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여기서 작가는 다시 한 번 어른들 때문에 너무나 빨리 닫힌 어린이의 세계를 무력하게 바라본다. 성인이 된 제제 역시 아이들에게 가끔 딱지와 구슬을 나눠주지만 그 역시 이 필연적인 패배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이렇게 말을 건넨다. ‘사랑하는 뽀르뚜가. 저도 너무 철이 일찍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왜 이렇게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모든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그럼에도 제제의 마지막 질문 어쩌면 어린이 만화가 던졌을 이 질문은 리얼리즘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