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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Jan 01. 2020

순수 웹툰 형상으로서의 초월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의 글들을 살펴보자. 만화 비평의 빈곤함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관련 글들은 얼마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있더라도 그 내용은 빈약하다. 그런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다수의 글들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를 동화적이라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럼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는 동화적 작품이 아니란 말인가?   마법과 신화가 공존하는 세계, 별똥별이 떨어질 때 탄생한 마녀와 그런 그를 맞이하는 고양이의 이야기. 게다가 이 모든 풍경이 눈부신 색체와 아름다운 작화로 펼쳐질 때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를 동화적이라고 말하지 않는 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화적이라는 말은 여전히 문제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텅 빈 기호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가령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와 전작 『양말 도깨비』는 모두 동화적이지만 동일한 층위로 묶일 수 없는 풍부한 세부를 가지고 있다. 비평은 치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동화적 관용구만으로는 작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동화적이라 말하고자 한다면 작품의 형식이 어떻게 동화적 요소와 관계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작품을 섬세히 읽어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동화적 기호를 보다 풍부하게 생산해낼 수 있다.     


동화적 기대와 페이지의 소멸

  만물상 작가의 작품은 동화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양말 도깨비』와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가 동일한 층위의 작품이라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동화적 기호가 작동하는 방식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양말 도깨비』의 동화적 본질은 무엇일까? 첫째, 출입문으로서의 칸이다. 누군가는 의아해할지 모른다. 칸과 동화가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이때 칸은 단순히 이미지를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때때로 『양말 도깨비』의 칸은 동화책을 펼칠 때 마주하는 그림을 둘러싼 틀이 되곤 한다. 이미지를 단정히 갈무리한 굵은 테두리에서 우린 동화적 기대를 투영한다. 동화책 볼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라. 안정감을 주는 직사각형 문턱에서 동화적 세계를 황홀히 바라본다. 그 칸은 달리말해 보는 이를 또 다른 별개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출입문이다. 둘째, 『양말 도깨비』의 또 다른 동화적 본질은 아르누보 양식이라 불리는 섬세하고도 고풍스러운 선과 문양이다. 꽃과 덩굴, 유기적 선과 기하학적 패턴은 『양말 도깨비』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더욱이 작가의 인장이라 할 수 있는 이 세부가 칸 주위를 에워쌀 땐 칸은 출입문에 이어 고전 액자와 같은 장식적 틀이 되곤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아르누보는 그 자체로 동화적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양식으로, 초창기 동화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에도 많은 동화작가에게 동화의 원형적 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아르누보 양식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에 이르러선 보다 더 화려히 전개된다. 특히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이미지를 적극 도입하면서 풀, 나무, 옷감, 머릿결과 같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래로 흘려보내 종국엔 기하하적 직선을 밀어내고 유기적인 선으로 칸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흘러내리는 유기적인 선을 주목해 보자. 선이 만들어낸 장식적 칸은 그 자체로 매혹적이지만 이 일련의 선과 흐름이 칸과 페이지의 경계를 흩뜨린다. 칸은 페이지가 되고 페이지는 다시 칸이 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칸과 페이지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하며. 물론 이러한 칸과 페이지의 형식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에서 처음 시도된 건 아니다. 오히려 웹툰의 보편적 형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는 기어이 주목할 만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칸과 페이지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웹툰의 순수한 형상으로 초월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의 페이지는 전통적 페이지로부터 이탈해 있다. 그 공간은 페이지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커다란 칸에 가깝다. 그래픽노블의 아버지 윌 아이스너가 주창한 슈퍼-칸처럼 페이지의 개념을 소멸시키려 한다. 그 결과 페이지는 칸이 되어 이미지를 재현하며 또한 칸과 페이지의 관계는 칸 안의 칸이나 칸 위에 덧붙여진 칸으로 분화한다.

 





별똥별이 떨어지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의 이미지들은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 하강하는 이미지들은 세로 스크롤과 상승작용 하며 역동적인 운동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칸과 칸, 칸과 페이지 사이의 분절을 매끄럽게 봉합하며 무엇보다 세로 스크롤에서 가로방향의 진행성을 구현한다. 웹툰을 보는 독자라면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가로로 넓게 펼쳐야 할 장면이 부자연스럽게 90도로 꺾이어 수직적 공간에 놓여 질 때의 당혹스러움을 말이다. 그렇다면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는 어떻게 웹툰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설까. 만물상 작가는 수직 운동을 본격 시작하기 앞서 수평 이미지를 살짝 기울인다. 그것은 수직의 흐름을 수평의 흐름을 이동시킬 일종의 시발점이다. 대각선 구도는 수평, 수직 모두 기울어져 있기에 양쪽 영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처럼 구도를 기울이는 행위는 놀랍게도 세로스크롤에서 수평의 파노라마를 경험케 한다. 다시 말해 서사에 앞서 이미지가 전면으로 떠오를 때 혹은 이미지가 수직의 연속성에서 일탈하여 기어코 수평의 방향으로 뻗어나갈 때 우리의 눈은 동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는 계속해 운동을 발생시키며 이어서 가속도가 붙은 이미지는 칸의 경계선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 말 그대로 폭발한다. 화면 전체를 채우며 경계 너머로 무한히 확장되는 이미지. 엄격하게 규정된 칸을 통해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하는 『양말 도깨비』와 달리, 하강하는 운동을 동반하는 이미지는 더 이상 페이지의 평면에 갇혀 있지 않고 이를 바라보는 우리를 완전히 에워싼다. 운동과 폭발의 총체적 울림으로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곳에서 기다려』 자신이 별똥별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이와 같은 별똥별적 순간이 우리의 망막에 나타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주인공 에픠의 모습, 눈부신 빛을 발하며 부상하는 그 순간을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가시적 표층에서 벌이는 운동이 주제론적 체계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견고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동은 자체로 별똥별 에픠의 존재를 상징한다. 동시에 신화에서 전해오는 태초의 이야기를 상기시키며 또한 마녀와 고양이의 간절한 염원을 형상화한다. 이렇게 이야기가 구체화된 운동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별똥별이 떨어지는 저편에 어떤 세계와 이야기가 펼쳐질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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