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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Apr 18. 2018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의 표지를 보자. 어깨에 가방을 걸친 한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 주위는 다양한 색채의 새들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 더해 제목을 참고해보면, 작품의 주인공이 오듀본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새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 있다.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주인공 ‘존 제임스 오듀본’은 18-19세기의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미국의 화가, 탐험가이며 무엇보다 조류학자로 현대 생태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만으론 그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진 못할 것이다. 오듀본은 젊은 시절 감옥 너머의 새를 바라보며 자신이 서있어야 할 곳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세상의 모든 새를 발견하기로 결심한다. 이 실존적 선택에서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근대적 인간, 근대적 산물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를 보면 영화 <잃어버린 도시 Z>가 연상된다. 두 작품 모두 경이로운 자연, 원주민의 타자화된 시선, 미지의 영역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 ‘존 제임스 오듀본’과 ‘퍼시 포셋’은 낙관적인 근대적 세계관을 공유한 인물이다. 사실상 두 주인공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동력은 근대적 세계관의 전망이다(정확히 두 사람은 동시대 인물은 아니다. ‘오듀본’이 사망 후 ‘포셋’이 출생한다).


 세계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욕망과 이에 상응하는 미지의 세계. 주인공은 대항해 시대의 지도를 그려나가듯 미지의 영역을 밝히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오듀본'은 세계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근대적 인간이다. 


 우리는 분명 주인공처럼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그 꿈은 인간이 미치지 않은 아마존이나 인간이 명명하지 못한 수많은 조류와 같은 미지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오듀본이 탐험할 당시만 해도 철길은커녕 인간의 발길조차 닿지 않은 많은 지역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근대적 인간이 열망했던 미지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이성의 영역 내지만, 현대에는 대우주와 인간인 소우주를 제외하고는 극적인 탐험의 대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듀본, 새를 사랑한 남자>의 매혹적인 여정은 현대에 존재하지 않는 철저한 근대의 산물이다.



그림으로 기록된 새

 주인공 오듀본은 새를 분류하고 기록한다. 이 역시 18세기 분류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생물학 즉 근대적 방법론이다. 사실 이것은 특별하진 않다. 근대적 인간이 근대적 방법론을 택한다는 것은 동어 반복적이다. 

 그렇지만 ‘오스본’의 행적을 추적하다보면 여기서 주목할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기록한 489종의 새는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남겨졌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오스본의 노년기인 1839년 다게르에 의해 발명된다. 이에 따라 오듀본은 새를 근대의 산물인 카메라가 아닌  회화 즉 그림으로 기록하게 된다. 


오슨본은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400여종 이상의 새를 기록한다.


 근대의 영토화가 미처 이르지 못한 지점, 즉 미분화된 근대의 모순은 오듀본 자신의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오듀본은 경쟁자 윌슨의 그림을 경멸했다. 그의 그림은 생기가 없고 경직됐다 생각한다. 새는 생물이며 죽은 정물이 아니다. 오듀본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이었다. 

 이로인해 오듀본의 그림은 미국 학회에서 예술적이긴 해도 자연주의적이지 않다고 비판 받는다. 심지어 ‘왜 과학적 작품을 한사코 그리려 하지 않는 거죠?’, ‘제각기 어울리는 자리가 있어요. 과학자는 박물관이, 화가는 화랑이 어울리죠’라고 하며 오듀본을 조류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듀본의 근대적 기획은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는 열정 때문에 일시적으로나마 근대 과학 영역에 진입하지 못한다. 


연필로 휘갈겨진 그림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그 세계는 자연 너머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오듀본, 새를 사랑하는 남자>는 보다 흥미로워진다. 오듀본은 새를 그림으로 그리고, 이 작품은 다시 그와 새의 모습을 다시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고 작화가 ‘제레미 루아예’는 ‘지나치게 활기가 넘치고 감상적이며, 새가 그림을 뚫고 나오려는 것 같이 낭만적’이라는 오듀본의 그림 세계를 재현하려 한다. 

 연필로 휘갈겨진 그림들은 새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어두운 밤하늘의 별은 어느새 하나의 별자리로 이어진다. 주인공의 욕망과 두려움은 꿈속에서 안개를 타고 유동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름 모를 수많은 새들이 장면 전체를 아찔하게 채우고 있다. 


 오듀본이 보여주려 한 건, 이 작품이 보여주려 한건 단순히 이성으로 재단된 객관적 사실의 나열만은 아닐 것이다.  오듀본이 경험했을 경이의 순간 다시 말해 그가 마주쳤을 대자연의 풍광과 생명의 기적을 함께 보여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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