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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May 18. 2018

코메 프리마:예전처럼




 이탈리아 샹송 칸초네 ‘코메프리마’는 이렇게 가사를 읍조린다. ‘오직 알고 있는 것은, 그대에게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이전처럼, 이전보다 더욱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노래가 갑작스러울 수 있다.  굳이 이 노래로 글을 시작했을까? 만화 <코메프리마>와 같은 동명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순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비록 짧은 구절일지라도 ‘코메프리마’의 노래는 고향으로,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코메 프리마>의 주인공의 여정을 헤아리게 만든다.


네오리얼리즘적인 작품

 앞서 언급한 노래를 상기해보자. ‘코메 프리마’, 1958년 이탈리아 샹송 칸초네. 여기에 방점을 찍는다면 ‘1950년대’와 ‘이탈리아’를 택할 수 있겠다. 만화 <코메 프리마>는 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솔길과 야트막하게 자리 잡은 건물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작가 ‘알프레드’는 인터뷰에서 네오리얼리즘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경의를 표하며, 또한 그것이 자신의 작품에 영감을 줬다 말한다.


 그렇다면 <코메 프리마>는 네오리얼리즘적인 작품일까? 먼저 네오리얼리즘의 정의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네오리얼리즘’은 꾸미지 않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려는 영화미학이며 또한 그 현실은 전후 이탈리아의 피폐한 경제, 정치, 사회적 상황들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이 지점에서 <코메 프리마>는 네오리얼리즘 작품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분명 무솔리니를 연호하는 대중과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정부와 같은 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역사를 다뤄지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작품 현재에 현존하지 하지 않으며, 대신 주인공의 과거 기억 속에서만 흐릿하게 비춰질 뿐이다. 게다가 주인공을 통해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보다 고향을 상실한 개인의 심리적 여정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른 이탈리아 작가인 ‘다비데 레비아티’의 작품 <그해 여름>과 비교해보면 이 점은 보다 명확하다. <그해 여름>은 네오리얼리즘의 특성인 느슨한 삽화적 구조를 취하며, 1950년대 이탈리아의 급격한 산업화와 이러한 발전에 괴리된 노동계급의 삶을 흑백의 음울한 정조로 그려낸다.


이탈리아 만화 <그해 여름>(좌), <코메 프리마>(우)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코메 프리마>는 그럼에도 여전히 네오리얼리즘의 자장에 머물러 있는 작품이다. 비록 이 작품은 피폐한 민중의 삶을 직접 묘사하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네오리얼리즘의 휴머니즘적 태도 즉 ‘모두에게 용기를 주고, 모두에게 인간이라는 의식을 주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사실 <코메 프리마>의 많은 인물들은 호감 가는 인물과는 거리가 있다. 주인공 ‘파비오’는 거센 성격에 옷과 머리는 그의 삶처럼 멋대로 헝클어져 있다. 여행 도중 만나는 많은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아니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말만을 끊임없이 내뱉는다.

 그들은 분명 결함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지나친 반감이나 분노를 일게 까진 하지 않는다. <코메 프리마>의 인물들은 근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을 신뢰하고 한 결 같이 낙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주인공의 여정 또한 빛나는 자연과 함께 한 없이 온화하고 포근하다.     


현재와 과거

 노래 ‘코메 프리마’의 제목은 ‘이전처럼’, ‘예전처럼’이라는 뜻을 가진다. 노래 가사는 이 보다 더 구체적이다. ‘이전처럼, 이전보다 더욱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만화 <코메 프리마> 는 이러한 과거에 대한 회환의 감정을 다룬다.

 주인공 ‘파비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을 버리고 고향을 등진다. 그리고 10년만에 나타난 동생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 유산을 물려주는 조건으로 함께 고향을 방문하자 제안한다. 어쩌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를 기회. 파비오는 제안을 받아들여 고향을 향한 긴 여행을 떠난다.    

 

 <코메 프리마>는 장소의 이동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는 로드무비 형식의 구조를 띠며,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 반복된다. 이 같은 현재와 과거의 지속적인 반복은 <코메 프리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현재와 과거는 단순히 서사의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을 규정하며 더 나아가 이 형식성은 다시 서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과거와 현재는 시간적, 심리적, 작화적으로 대립된다.



 <코메 프리마>의 현재와 과거의 작화 방식을 유심히 살펴보자. ‘현재’는 드로잉 선과 다채로운 색상으로, ‘과거’는 목판화의 선과 단조로운 색상으로 대조를 이룬다.

 현재의 드로잉 선은, 심리적 원인이 육체적 결과를 낳듯, 주인공의 막다른 삶과 상처받은 내면을 드러낼 때 더욱 흐트러진다. 삶의 목적을 상실한 초반부 권투 장면에서 주인공은 상대 선수와 어지러이 엉켜있다. 심지어 이 선은 과거의 진실을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형태를 유지하기를 포기한다. 내면으로 침착해가는 주인공은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동물의 모습에 가까우며 종국에는 몇 가닥 얽힌 선으로 소멸한다.

 반면 간결한 선과 평면의 여백으로 이뤄진 과거의 작화는 아련한 과거의 기억을 형상화하면서도 한편으로 유년기의 따뜻하면서 씁쓸한 추억을 끌어안고 있다. 세부가 사라진 단순화된 묘사는 빛바랜 과거의 흔적을 담아낸다. 또한 장면을 에워싼 노란색의 색채는 과거가 눈앞에 펼쳐진다 해도 설사 애써 따라간다 해도, 그것은 결국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사라질 거라는 불안한 예감을 하게 한다.


 현재와 과거의 시간적, 심리적, 작화적 이항 대립.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주인공 파비오는 작품 제목처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이분법적으로 선명하게 갈린 현재와 과거는 화해가 가능한 걸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선 우선 주인공과 동생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향으로 향한 긴 여정은 분명 주인공의 과거를 보듬고 이를 통해 그를 성장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코메 프리마>는 이 과정에서 극적인 사건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특히 주인공과 동생의 관계에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다. 두 형제의 다툼으로 동생의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생을 포함한 남겨진 가족의 상실감을 보여줄 뿐 형제의 극적인 화해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하염없이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광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오렌지 색체로 물들다

 최종 기착지인 고향에 당도할 때까지 주인공의 내면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의 인간관계는 부재하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면, 주인공 파비오를 변화시킨 건 도대체 무엇일까?

 주인공의 여행은 사실 타자와 관계 맺는 물리적 여정보다 차라리 자아의 세계로 홀로 탐색하는 정신적 여정에 가깝다. 물론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코메 프리마>는 그래서 인간을 대신해 아름답고도 넉넉한 남부 유럽 이탈리아의 풍토를 펼쳐낸다. 지평선 너머로 느긋하게 이어진 오솔길과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는 대기는 객관적 배경을 넘어 심리적 여정을 위한 세계로 변모한다.


고향인 남부유럽 이탈리아의 넉넉한 풍토는 주인공을 포용한다.



 초반부 주인공이 거주하는 도시는 잿빛의 색깔로 짓눌려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멀어져 고향으로 가까워질수록 세계는 점점 화사한 빛들로 채색되어 간다. 이전에는 미처 볼 수 없던 채도 높은 코발트색의 하늘. 심지어 어둠이 짙게 깔릴 때조차도 그 밤하늘은 고요하고 투명하다.

 무엇보다 과거를 채색하던 노란색이 현실 세계를 넘어 눈부시게 진동한다. 들판을 가득 매운 노란색 물결, 하늘을 발갛게 물들여 가는 붉은색 노을, 그리고 후각을 마비시킬 만큼 아찔하게 내뿜는 오렌지 향기. 고향의 풍토가 자아내는 이 넉넉함이 아니고선 주인공의  그 평온한 표정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인공 파비오는 지평선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의 드로잉 선은 목판화의 선으로 변화하고 현재와 과거는 마침내 예전처럼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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