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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Feb 27. 2020

회삿돈, 그거슨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 거시여

회삿돈을 대하는 직장인의 자세

회사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PC를 교체해준다. 마침 작년 11월이 교체시기라 견적을 맞추고 12월에 교체했다.  때가 잘 맞아 모니터까지 4K 30인치로 교체할 수 있었다. 이백여만 원 정도 들었는데 부서 비용으로 처리된다.


새해에 팀장님이 작년 부서 매출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 몇백만 원 차이로 간신히 흑자를 봤다고 한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PC 교체로 적자가 날 수도 있었단 얘기다. 연말은 매출 때문에 모두 바쁘고 민감한 시기다. 개발자라 매출에는 다소 무신경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비용을 써버렸다. 정말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PC 교체가 급하지도 않았다. 새해에 바꿔도 되는 건데 장비 욕심에 앞뒤 생각해보지 않고 질러버렸다. 




회삿돈이란 게 그렇다. 일단 내 돈은 아니니 마음가짐에 함부로가 들어간다. 내 지갑에 만원과 회삿돈 만원의 가치는 전혀 다르지 않지만 내 돈 만원을 대하는 마음과 회삿돈 만원을 대하는 마음은 전혀 다르다. 회삿돈은 쓸 수 있으면 일단 쓰려고 들게 된다. 내 돈 써야 했으면 가성비, 가심비를 따지고 쓸지 말지를 결정하지만 회삿돈은 그런 거 없다. 쓰고 나서도 고마운 마음은 없다.


회삿돈 몇만 원 아끼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회사가 버는 돈은 내가 쓴 몇만 원 보다 많은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쓰는데 그것도 쓰면 안 되나? 쓰는 게 문제라면 나보다 더 쓰는 사람이 문제 아닌가? 야근까지 했는데 집에 갈 때 택시비 쓴 게 문제인가? 그럼 야근을 시키지 말던가. 나보다 일 덜하는 사람이 연봉은 더 높다고? 그럼 다른 돈이라도 좀 써도 되지 않나? 


직장생활을 하며 했던 회삿돈에 대한 이런 생각들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논란과 고민을 안겨준다. 이제는 한 가지 결론을 낼 수 있는데 회삿돈 함부로 쓰는 사람 치고 회사를 길게 잘 다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돈이 직접적인 원인일 수도 있고 돈을 대하는 마음가짐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건 회삿돈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느냐가 회사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돈을 받기만 하는 입장이다 보니 돈 주는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돈 주는 사람, 사장의 마음은 어떨까? 일도 못하는 저놈이 이만큼의 돈을 받아가는 것도 성질이 나는데 거기다 이런 돈 저런 돈 함부로 써대고 휴지, 종이컵 같은 비품도 마구 소비한다. 그리고 때 되면 연봉 올려달라고 시위하고 안 올려 주면 불만 생겨서 툭하면 다른 회사에 이력서 뿌리고 다닌다. 회사와 경제는 좋았던 적이 없는데 저놈한테 드는 돈은 매년 늘어난다. 거 참, 사장도 극한직업이네.


회사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나를 위해서? 사장을 위해서? 아님 국가 경제를 위해서? 사장과 국가는 알바 아니고 일단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당장 이 회사 없어지면 실업급여 몇 개월로 버티며 다른 회사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나를 미워해도 꼬박꼬박 월급 안겨주는 이 회사 아니면 어디서 돈 받아먹을 데도 없다. 회사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 회사가 없어지면 나도 죽는다. 내가 아낀 몇만 원으로 회사 살림살이가 미약하게나마 나아질 수 있다면 내 생명도 그만큼 연장되는 것이다. 연봉까지 안 올려주는 건 참을 수 없지만 그 외의 것들은 아끼고 안 쓸 수 있다. 그래 봐야 불편이 조금 가중되는 정도이다.  아하, 이것이 회사에서 주인의식의 시발점인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직원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던데 그럼 나도 뭔가 달라지고 연봉도 더 받을 수 있는 건가?




이것 또한 작년 말 얘기다. 회사에서 용도가 한 가지로 정해져 있는,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 풍토가 만연해져 너도 나도 다른 용도로 썼다. 회사 시스템의 구멍을 악용한 것이다. 하지만 구멍이란 건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메꿔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하필 따뜻하고 훈훈해야 할 연말에 구멍이 메꿔졌다. 구멍에서 나오던 돈은 하루아침에 올가미로 바뀌어 그 앞에서 목놓아 기다리던 사람들의 목을 죄었다. 함부로 돈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이래저래 불려 다녀야 했고 사용 출처를 증빙해야 했다. 나도 옆에서 몇 번 얻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쟤도 쓴다고 나도 따라서 썼다면 지옥 같은 연말을 보냈겠지. 그때 뼈저리게, 가슴속 깊이 깨달았다. 


회삿돈은 절대 함부로 쓰면 안 되는구나. 그거 잘못 쓰면 그냥 죽는 거구나. 


남의 돈 먹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안다. 회삿돈도 남의 돈인데 매일 가는 곳이라고 우리가 남이가~ 하고 썼다가는 영영 남이 될 수도 있다. 그 돈은 주면 감사히 받는 거고 그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 


얼마 전부터 회사에서 마스크를 한두 개씩 보급해 주고 있다. 뭘 이런 것까지 나눠주나 했는데 그러면서도 내심 고마웠다. 그때만해도 큰 비용은 아니었겠지만 이렇게까지 직원들을 신경 써주다니 좋은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 구하기가 어려운 이 시점에서는 한두 개 나눠주는 것도 엄청 크다. 보급이 뜸해져서 왜 그런가 물어보니 회사도 요즘 마스크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내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회사의 입장을 생각하면 눈물겹다. 회사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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