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분들, 여름에 반바지 입으시나요?
2000년 초. 군대 제대 후 복학 전 이런저런 알바를 전전하고 있었다. 당시 IT 회사에서 근무를 했다. 어느 여름날 나를 담당하던 정직원 누나가 더우면 반바지를 입고와도 된다고 얘기해 줬다. 고민할 것도 없이 다음날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그리고 부장님에게 여름을 날려 보낼 만큼 시원하게 욕을 먹었다. 군대도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순식간에 개념 없는 놈으로 낙인찍히고 여러 사람에게 눈총을 받아야 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중소 IT 기업이었지만 토요일 격주 출근도 존재하던 시기의 회사는 딱딱한 면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의 충격으로 최근까지 반바지로 회사를 간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요즘 쿨비즈 같은걸 시행하는 회사도 많아지고 남자도 반바지를 입는 분위기가 제법 조성되어 있다. 여자는 되고 남자는 안되고, 그게 단지 복장의 문제라고 하면 양성 평등이 화두인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름에는 다 같이 덥고 남자도 편하고 시원한 반바지를 입고 싶다. 그래서 체력도 보존하고 건강도 챙겨서 업무 효율이 올라갈 수 있다면 회사에서 적극 장려해야 한다. 반바지를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주 좋다.
우리 회사에서도 여름에는 남성 직원의 반바지 착용이 허용된다. 몇 년 전부터 슬금슬금 입기 시작하더니 작년에는 입어도 된다는 그린라이트가 직접적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반바지를 입고 출근 후 챙겨간 긴 바지로 갈아입은 적은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근본적인 거부감
회사 생활 시작부터 반바지가 허용된 적이 없다. 그래서 반바지를 입고 회사 생활을 한다는 것에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다. 착용을 허용해 줬어도 아직 반바지를 입은 남자 직원을 보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든다. 나도 안 입는데 네가 입어? 와 같은 불쾌감. 이건 꼰대가 됐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2. 새로 구매해야 함
회사에 입고 올 만한 반바지가 없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추리닝 같은 반바지는 몇 개 있지만 제대로 된 반바지는 또 사야 된다. 몇 번 입을 것 같지 않은 반바지를 산다는 게 낭비로 느껴진다.
3. 안 이쁨
반바지를 입은 남자 직원들을 보면 별로 안 이쁘고 안 어울린다. 남자들의 두꺼운 다리와 많은 털 때문이기도 하고 반바지를 입고 이쁜 핏을 만드는 게 어려워 보인다. '당신은 긴 바지 입어도 안 이뻐요'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반바지는 그나마도 어렵게 만든다.
4. 조금 시원하고 이미지에 안 좋음
회사에 하루 종일 있으면 더울 일이 별로 없다. 출근할 때, 점심 먹으러 나갈 때, 퇴근할 때 빼고는 사무직이 밖에 있을 일이 없다. 사실 반바지 안 입어도 업무에 크게 지장이 없다. 나이를 제법 먹은 사람의 이쁘지 않은 반바지 핏을 보면 안 어울리는 것을 떠나서 보는 사람에게 나쁜 이미지까지 심어준다. 잠깐 시원하자고 이미지 흐릴 필요를 못 느끼겠다.
5. 외근이라도 가게 되면
가끔 미팅이나 기술 지원 등의 이유로 예고 없이 외근을 나갈 경우가 있는데 그때 반바지를 입고 간다면? 고객사에서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
그밖에 형평성의 문제도 있다. 외근이 잦은 영업이나 기술지원 직군은 항상 정장 차림인데 사무실에 하루 종일 있는 개발자들은 반바지 입고 있으면 당연히 형평성 문제도 생각나게 한다.
반바지를 입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입으려면 최소한 어울리게 잘 입었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과의 형평성도 생각하며 입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에 입는 반바지는 득 보다 실이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