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무도 없는 방구석에서... 上
-까륵. 까륵.-
-꼴.꼴.꼴.꼴.꼴.-
“크아...”
그날 이후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식탁 위에는 항상 초록색 빛을 내는 친구가 그 자리를 지켜주었다.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날입니다. 과연 대망의 마지막 10인 중 제일의 탑 4는 누가 될까요? 지난 1년간 함께 세계 최고의 미녀를 가리는 이 서바이벌에 함께 참여해 주신 전 세계 시청자 여러분. 이제 그 결과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한 이곳 상해에서 곧 공개됩니다.”
방송국 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놈들이 내게서 뺏어간 그 프로그램의 누구보다 열렬한 애청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누구보다 그 프로그램을 증오하는 익명의 악플러였다.
「 BehindTheScene : 이래서 공영방송이 개인방송에 밀리는 거다. 철 지난 연출 복붙하 듯 쓰지 좀 마라. 」
「 BehindTheScene : 하여간 기성세대들이 자리를 떠나가지 않으니까 방송이 변하지 않지. 세상은 변하는 데 언제까지 과거에 머물러 있을 거냐? 」
“백현성. 개 잡놈의 새끼. 빽으로 PD자리 꿰찬 새끼가 실력이 있을 리가 없지. 멍청한 새끼. 언제적 연출을 아직도 쓰고 있냐?”
익명성 뒤에 숨은 책임 없는 쾌락. 얼굴을 보이지 않고 카메라 뒤에서 돌을 던지는 비겁자. 가장 혐오하고 한심하게 생각했던 악플러. 재미로 던진 돌을 맞고 죽은 개구리에게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순수한 쓰레기들. 처음에는 혐오했던 놈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 자체에 굉장히 큰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익숙함은 생각보다 그 죄책감을 빨리 무디게 만들었다.
“하아... 카메라 뒤에서 웃고 있을 새끼들 생각하니까 화가 안 가라앉네.”
그러나, 어거지로 내 자리를 강탈해 간 놈들의 면상을 떠올릴 때면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부아가 화산폭발 하듯 다시 입과 손으로 터져 나왔다.
“아니... 이딴 프로를 왜 몇십억 명이 보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뽑고 그 미녀에게 미래기술의 집약체인 나노패브릭을 전달하는 나의 기획은 남들의 손에 만들어져 전 세계의 사람들이 보는 역사적인 쇼프로가 되었다. 기업에서 내건 거대한 상금도 한 몫했지만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미녀들이 포샵이나 보정 없이 세상에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엄청난 시청포인트가 되었다.
“안타깝습비다. 마지막 탑 10의 첫 번째 탈락자는 츠키카게 유우입니다.”
「 BehindTheScene : 유우가 왜 떨어지냐? 방송에서 대놓고 주작하는 게 말이 되냐? 」
「 BehindTheScene : 카메라 뒤에 숨어서 랭킹 조작하는 제작진과 방송국 놈들! 부끄럽지도 않냐? 」
첫 시작이 어려웠을 뿐 이후로는 녀석들에 대한 무분별한 투석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어졌다.
“과장님. 오늘은 끝나고 뭐 하세요?”
“집에 가서 뭣 좀 봐야 해서요.”
“오늘도요?”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방송국을 때려치우고 나와 작은 제작사에 들어간 직후에 내가 기획했던 프로그램가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 당시 내가 쏟았던 열정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였는지 새로운 둥지에 몸을 담고 나서도 과거의 나를 놓아주지 못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과장님. 오늘도 회식은 안 오시나요?”
“죄송해요. 제가 요즘 저녁에 계속 일이 있어서...”
“한 번 시간 내주세요. 다들 과장님 궁금해하세요.”
“다음 주에 한 번 시간 봐요. 그때쯤이면 시간 될 것 같아요.”
사내 정치와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싫어서 나온 방송국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점점 더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닌 제품만 포커싱하는 광고들만 기계처럼 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제품만 포커싱 하더라도 결국 모델들이 필요했고, 클라이언트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모델 분 어디시래요?”
“지금 거의 다 왔다고 하는데...”
“30분 전에도 그 말하지 않았어요?”
“네. 그렇긴 한데...”
“집에 가라고 해요.”
“네?”
“다른 사람 빨리 구하죠. 아니다. 그... 막내작가 이름이 뭐였지...”
“은희요?”
“그래. 은희야!”
“은희는 왜요?”
“은희 이쁘잖아요.”
“아니. 그래도...”
“어차피 얼굴 안 나오잖아요. 제가 알아서 잘 만들게요.”
방송국을 나왔지만 그때와 같은 상황은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어딜 가나 연예인병을 걸린 인간들이 있었고, 어딜 가나 약속을 어기는 것에 단 한 점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과장님. 다음부터는 조금 막내작가 쓰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아니. 과장님. 아실만한 분이 왜 더 그러세요? 출연진들 조금씩 늦는 거 어떻게 보면 이 업계에서 비일비재한 일인데... 왜 이렇게 칼 같이 구세요?”
“대리님.”
“네?”
“대리님. 지금 맡고 있는 업무가 뭐예요?”
“조연출입니다.”
“조연출로써 일에 빵꾸를 냈으면 미안한 줄 아세요. 계속 다른 사람 탓 하지 마시고요. 왜 본인이 잘 못해서 남들이 피해 보는 걸 당연하게 이해해 달라고 합니까?”
옛날이었으면 한 번쯤은 삼켰을 그럴 말들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악플을 달았을 때와 달리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글을 던지게 된 것처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독설을 구태여 입 밖으로 뱉어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어지게 되었다.
멸망의 여신들 _ 웹소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