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차
“어우... 왜 이렇게 피곤하냐...”
“어제 과음을 했나? 회복이 안되네.”
“이제 살살 마시자. 진짜 하루 밤새면 이틀을 죽는다.”
애석하리만치 시간은 우리를 빠르게 통과했고 우리는 그렇게 곳곳에 세월의 흔적을 떠안게 되었다.
“하아...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요즘은 잘 지내냐?”
“잘 지내지.”
“결혼생활은? 할만하고?”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 모르는 녀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우리의 대화에서도 그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한 병 더 시킬까?”
“안돼. 나 내일 오전에 회의 있어.”
“그래. 그만 마시자. 더 마시면 좀 피곤하겠다.”
“그래. 빨리 들어가자. 다음에 와이프한테 얘기할 테니까 같이 보자.”
“그래. 뭐 어색할 것 같은데 그러자.”
상대를 찌르고 아프게 하던 말들은 점점 뭉툭해졌고, 아침해를 보지는 않더라도 푸르딩딩하게 밝아지던 새벽을 봐야 직성이 풀리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저 진짜 제 스타일이셔서 그런데 혹시 괜찮으시면 번호 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헌팅장면들. 핸드폰 기종이 바뀌고 패션은 바뀌었지만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가 남자를 찾는 DNA의 영역은 그때 그대로였다. 변한 건 그때만큼 부지런하지도 의욕이 넘치지도 않은 나였을 뿐.
-하하하하하.-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예능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조금은 더 젊었을 그때의 시절. 조금은 더 파이팅 있었던 어릴 적의 시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나 또한 조금은 얌전해졌다. 동적인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쉽사리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고, 집 밖을 나돌아 다녀야만 힘을 얻었던 성격에서 홀로 침대에 뒹굴거리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으로 점점 변해갔다.
“술 마시자. 씨발놈들아.”
“여자는?”
“몰라. 생기겠지.”
미래를 생각할 때보다 뒤가 없이 살 때가 더 많았다. 자취하는 친구집에 모여서 그다음을 시작할 때도 많았고, 새벽운동이 있더라도 일단은 노는 걸 택할 때도 많았다.
“미팅 고고?”
“이번에는 어딘데?”
“●●여대. 무슨 언어과라고 했는데. 몰라. 일단 가보자.”
우리 학교는 정말 미팅이 많이 들어왔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했던 것 같다. 다들 혈기왕성했고 노는 걸 좋아했다. 당시에는 6명, 8명이서 모여서 안주 2개 시켜놓고 술만 마시던 느낌으로 많이 놀았어서 미팅이 가성비도 좋았다. 그러다, 한 번씩 한, 두 학번 높은 친구들과 놀게 될 때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병신샷! 병신샷!”
“아... 또 걸렸네.”
서로를 취하게 하고 싶은 거면서 학교의 명예를 운운하며 술게임을 더 잘하는 걸로 서로 간의 자부심을 느끼고는 했다.
“몇 단계?”
“4단계부터 시작하자.”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여자가 남자 위에 올라가야지.”
텍스트로 풀어내기에는 남사스러운 게임도 많았고, 서로의 살갗이 닿는 모든 순간에 말초신경이 자극되는 걸 느꼈다. 그렇게 놀 수 있을 때 놀았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야... 너 좀 변했다. 원래 이렇게 야하게 놀았어?”
“어? 이게 야한 건가?”
“그렇지. 얼음 빨리 녹이기가 뭐야?”
“지면은 진짜 개야함.”
사람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색깔이 있는 것 같다. 생명이 생기면서 푸르른 새싹이 나는 초록빛을 생각하고, 나이가 먹고 영글수록 추수의 색인 황금색이 떠오르듯이 그 당시 우리의 색은 선명하고 바알간 선분홍 색이었던 것 같다.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웃을 수 있었고, 굳이 뽐내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끌리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가 많이 그립기도 하다. 단순히 지금보다 자극적이고 재밌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철없이 서로에게 끌리고 아파할 수 있었던 시기가 그리운 것 같다.
“아니 연애 좀 해.”
“마... 그게 말처럼 쉽냐?”
“그냥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은 만나봐.”
“외모만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다른 것도 다 걸려.”
나이가 먹고 병이 들면 약도 하나만 먹을 수가 없다. 이 약을 먹으면 저게 필요하고, 저 약을 먹으면 또 다른 약이 필요하고. 지금의 연애시장에서 우리가.... 아니, 내가 조금 그런 환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다시 한번 그런 선분홍 시절이 올 것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그런 재미를 다시 한번 느낄까 싶기도 하다. 몸도 정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고 해야 하나? 봄이 아닌 가을에도 아름답게 물든 단풍과 사과처럼 다시 한번 새빨간 시절이 오기를 기대하지만 사실 다시 그렇게까지 놀고 싶지는 않다. 뭔가 조금은 정제된 상태로 도파민을 느끼고 싶다고 해야 하나?
조금은 아니 조금 많이 세월이란 녀석이 나를 지나쳤나 보다. 조금 많이 세월이란 흔적이 내 몸에 켜켜이 쌓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