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본 개구리 下
구현의 말에 유정은 자연스럽게 우선 회의를 먼저 시작하자며 대화를 리드해 나갔다. 나는 군말 없이 흐르는 대로 이야기를 따라갔다. 처음부터 내 의사를 너무 내비치는 것도 성향에 맞지 않았고 사실할 말도 없었다. 일단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선 동쪽코스는 이렇게 짜볼까요?”
“좋네요. 어차피 이게 평가로 보이는 부분들이 많으니까 기본적으로 포스팅을 했을 때 좋아요나 추천을 많이 받는 게 유리할 수 있어요.”
버스를 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팀플을 여러 번 해봤지만 뺀질거리면서 자신의 일을 미루는 빌런들을 만날 때면 정말 살인충동마저 일어나는 듯했다. 그런데, 반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일을 진행하는 능력자들을 보자 나는 감히 나설 자리조차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일반적인 회사에서 이런 능력자들로 팀이 구성되어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냥 눈치껏 두 사람이 말하는 회의내용을 정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말없이 뇌를 빼놓은 느낌으로 들려오는 둘의 이야기를 쭉 훑어냈다.
“아... 어디까지 했죠?”
“제주도 동서남북 기준 해쉬태그 순으로 관광지 찾기요.”
“역시 정리하는 분이 한 분은 꼭 있어야 해요. 감사합니다.”
중간만 가라는 인생의 선배들의 말이 꽤나 귀감이 되는 순간인 듯했다. 이후로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역할을 맡아가면서 프로그램을 따라갔다. 유정님은 마케팅과 디자인을 구현님은 PPT와 기획안은 그리고 나는 일정 및 스케줄 정리와 회의록 정리 같은 중간다리 역할을 진행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렇게 눈에 띄는 일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팀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직 팀원 한 분이 오지 않아서 우선 우리는 먼저 활동을 진행해 나갔다. 유정님이 렌트한 반질거리는 외제차를 타고 우리는 제주도의 해안가를 따라 성산을 거쳐 김녕까지 올라갔다. 구름은 꼈지만 하늘도 창창하고 뭐 하나 나무랄 것 없이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새파랗다 못해 녹음이 끼어있는 것만 같은 해안선은 큰 세상을 보지 않고 조막만 한 독서실 책상에 나를 가둬놓았던 나 스스로를 질책하게 만들었다.
“아... 좋긴 좋네요.”
“그러니깐요. 사진 좀 많이 부탁드릴게요.”
“네.”
“아. 그리고 저희 단톡방 하나 팔까요? 어차피 이런저런 내용 서로 공유하고 모이거나 그러면 전화번호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좁지만 차라는 한 공간 안에 있다 보니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달리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며 지금껏 찍지 못한 사진들을 핸드폰에 하나씩 수놓았다. 산에만 살던 화전민이 바다를 처음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땅보다 바다가 더 넓은 이 지구에서 산에 불을 질러가며 살아가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화전민이 바다에서 숨풍숨풍 올라오는 해조물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을 지르고 땅을 일구어서 새싹이 자라고 곡식을 채우고 다시 긴긴 겨울을 버티는 화전민들의 입장에서 배를 끌고 가 그물과 낚싯대만 가지고 나가 언제든지 바다에서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는 어부들을 보면 바다는 산에 비해 편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와. 여기 진짜 맛있네요.”
“그러게요. 와보길 잘했네요. 사진은 잘 찍었죠?”
“네. 그럼요.”
성게미역국이었다. 살면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경상도에서 도다리 미역국을 먹는다는 이야기도 생소했는데, 평생 소고기 미역국만 먹어본 서울촌놈 입장에서는 성게미역국은 살짝 혁명적인 맛이었다. 바다의 향이 직접적으로 전해지지만 비릿함이 느껴지지 않는 뜨끈하고 미끄러운 질감. 오랜만에 바다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낯설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 그냥 그 자체로도 만족스러운 느낌. 조급하고 답답한 마음을 벗어난 것이 이유였는지 하루종일 이런 상쾌한 마음은 기분 좋게 지속되었다.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 함께 저녁식사 하시고 나머지는 개인일정이니까 다들 편하게 활동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방은 2인 1실이니까 같은 방에 배정받으신 분들끼리 함께 써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상쾌하게만 끝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2인 1실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다시 걱정이 몰려왔다. 심지어, 그나마 친해진 구현님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다른 조의 박신일이라는 분과 함께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나이가 조금 되시는 분이었다. 30대 후반으로 가장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어른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어른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함께 방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 같은 조로 묶인 조원들과의 첫 만남보다 훨씬 더 불편함이 느껴졌다. 평생 음악을 하시며 실용음악 학원을 운영하시다가 다른 길을 가고 싶어 이 프로그램에 들어왔다는 유준범 형님. 공통점이 없어서 쉽게 친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남자끼리는 쉽게 친해지는 마법의 주제가 있었다.
“군대 어디 나왔어요?”
“저 전방 나왔습니다.”
“오. 전방 어디요? 저도 전방이었는데.”
참 쉬웠다. 세상은 혈연, 학연, 지연, 흡연이라는 말도 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 모든 이야기의 스타트를 찍는 데 있어서 군대이야기는 정말 마법의 이야기였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확실히 맞는 말 같았다. 한참 나이 많은 형님이긴 했지만 공감대가 한 번 만들어지니 꽤나 편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동네 아저씨처럼 친해진 우리는 함께 저녁장소로 갔다. 일렬로 길게 늘여진 뷔페식 식당에서 이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깔깔깔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금세 무슨 동네 잔치집처럼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제주도라서 그런지 주변에 있는 야자수와 무한리필처럼 나오는 생맥주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는 마치 외국의 파티를 방불케 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프로그램이 왜 취창업 프로그램에서 필요한지. 왜 취업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인맥들을 쌓게 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건지.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의 세상은 우물 안일 수밖에 없었다. 동그란 천장 위에 그려진 하늘을 보고 그게 세상이라고 생각한 개구리는 세상이 어떻게 펼쳐져있는지 확인한다면 아마 세상에 적응하기도 전에 맹수들의 발톱에 찍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아. 재영 씨는 공부를 오래 하셨구나. 그럼 유정님은...”
“우와. 저도 비슷한 일 했는데.”
스펙이라고 해봤자 책상에 앉아서 공부밖에 하지 않은 내 이야기는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많이 진부한 이야기였지만 확실히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득바득 살아왔던 이 맹수들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바로 날 뜯어먹지 않았다는 것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보다 배울 게 많았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필기했던 것이 습관이 되어있던 탓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족족 핸드폰에 적었다. 흥미로웠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한 가지 특징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자신의 필드에서 잘 나가던가 잘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하기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흘려들으면 시냇물이겠지만, 잘 모아둔다면 거대한 담수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가 그치고 바닥이 말라 내가 필요한 시점이 되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스토리텔링들이 무수하게 쏟아지는 것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뭐예요? 재영씨 지금 제 얘기 받아쓰는 거예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그냥 흘려듣기에는 아쉬운 얘기라서요.”
“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제가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무슨 강연 듣고 필기하는 것 같아서요.”
“너무 이야기가 재밌어서요.”
“고마워요. 저도 누가 제 얘기를 그렇게까지 재밌게 들어주는 건 또 처음이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적고 있는 내 모습이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듯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었고 그게 그렇게까지 큰 힘이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맥주를 마시며 신나는 분위기에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노는 데 조금 더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안녕하세요. 제가 오늘 조금 늦어서 그런데...”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 조에 배정되었지만 일정이 있어서 늦게 오셨다는 배여진 사장님이었다. 이전에 사업하나를 팔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돌아다니며 재창업을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나이는 아마 이 모임에서 가장 많은 분 중 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외형이나 그런 모습만 보았을 때는 조금 젊은 느낌이 나는 분이었다. 이전에 우연히 시작한 카페창업이 몸집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은 지분만 처리하고 현재는 백수라면서 자신을 낮추고 있었지만 확실히 그 내공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분이었다. 분명, 학교에 계시는 교수님들보다 젊은데 교수님들보다 더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를 품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지만 캐릭터가 모두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 모아둔 것도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나자 하루가 조금 알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부터 점심, 저녁, 그리고 밤에 맥주파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정을 같이 하니 시간은 해안선에서 본 풍경처럼 빠르게 우리를 지나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