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 下
“캠프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 다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캠프가 끝인데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셨으리라 믿습니다. 이후 후속 프로그램은 추후에 따로 안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마지막 파티가 잡혀있는데요. 이전부터 워낙 네트워킹을 잘해주셔서 따로 파티를 안 만들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여러분들과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루프탑에 케이터링 파티를 참여했으니 모두 저녁 식사시간에 올라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캠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나있었다. 오랜 기간 패배의식에 잡혀있던지라 자존감 높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함께 하는 것이 과연 나와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을 신청할까 말까 마지막까지 그 작은 클릭하나에 고민하던 때가 기억이 났다. 돌이켜보면 기껏해야 2주지만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또 한 번 생각하면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 일에 그렇게까지 내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 애처로우면서 가소롭다는 생각을 했다.
-풉.-
“뭐야? 왜 혼자 웃어요?”
“하하. 아니에요. 그냥 좀 웃긴 생각이 나서요.”
“뭐지? 재밌는 일 있으면 알려줘요. 그렇게 혼자 웃지 말고.”
“하하. 별 거 아니에요. 올라가시죠. 일단.”
2주 동안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은진님과 함께 루프탑을 걸어 올라가니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세상은 주황색 노을을 지나 핑크색으로 푸르른 하늘을 색칠했다. 제주도 일정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라도 하듯, 짧은 시간이지만 진심으로 프로그램에 전념했던 나를 보듬어주기라도 하듯 하늘은 형형색색의 색을 칠해주었다.
“이쁘네요.”
“그러게요.”
사람들이 하나, 둘 루프탑에 올라왔다. 다들, 마지막 파티라는 설렘으로 한껏 텐션이 올라 루프탑에 올라왔지만 이내 아름다운 풍경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넋이 나간 듯 노을이 지는 바다를 보며 핸드폰을 들어 올려 그 순간을 기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불이 꺼지고 머리 위의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우리는 시원한 바람에 맞춰 살얼음이 낀 맥주잔에 차가운 맥주를 부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을 건배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기분 좋은 건배사가 터져 나왔고, 이전까지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모두 다르게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밤을 즐거운 마음으로 축하했다.
“재영님?”
“안녕하세요.”
프로그램 면접 이후에 처음 만났다. 이번 취창업캠프를 추진한 기관장님이었다. 2주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입에 침이 마르지 않게 칭찬을 해주는 데 정말 사람 몸 둘 바 모르게 만드는 능력 하나는 탁월한 듯했다. 그러나, 이내 도청과 시청에서 온 공무원들을 소개해주며 내게 사람들의 명함을 받아두라는 이야기를 했다. 한 번 명함을 주고받는 시간이 시작되자 사람들의 지갑이 수북해질 정도로 많은 명함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발표 질의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는 말을 했다. 사실, 기분이 좋았다. 무례한 사람에게 한 번 제대로 카운터를 날린 느낌. 빌런을 없애고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너무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한 바탕 명함의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 다들 조금 차분해진 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교장선생님 같은 기관장이 한 번 입을 열자 후끈거리며 즐거웠던 자리에 적막이 자리 잡았다.
“제가 오늘 여기 계신 분들 한 명, 한 명 다 면접을 봤거든요.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빛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식상하지만 한 번 소감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정말 진부했다.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촛불을 켜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수련회 교관처럼 말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중충한 수련회 강당이 아니라 제주도 호텔의 루프탑에서, 촛불이 대신 맥주잔을 들고 눈물이 아닌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느낌으로 서로의 진심을 듣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자. 그럼 재영님. 한 번 말씀해... 아니. 재영님. 재영님은 다른 얘기 한 번 해주실 수 있어요?”
“네?”
“면접에서 재영님 말이 너무 인상 깊어서요. 왜 그런 말을 한지 조금 듣고 싶네요.”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꽤나 시간이 지나서인지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그때 기관장이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포기할 때를 알고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용기에 대한 말을 했었잖아요.”
기관장의 말에 사람들의 입에서 ‘오’하는 소리와 함께 괜히 부추기는 감탄사들이 흘러나왔다. 사실, 숨기고 싶은 과거가 더 많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기에 굳이 입 밖으로 꺼내기 싫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수많은 눈동자들을 보니 막연하게 입을 닫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게. 사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부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냥, 나만 무언가를 가져가려는 건 아닐까? 사람들이 가진 서로 간의 생각과 장점을 나누는 것이 프로그램의 취지라면 내가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1년에 약 20~30만 명의 공시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거기서 합격하는 인원은 기껏해야 3프로예요.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20만이 넘는데, 차고 넘치는 20만 명의 이야기를 '과연 사람들이 궁금해할까?'에 대한 게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생각보다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벌거벗은 느낌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은 굉장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마저도 나에게는 도전 아닌 도전이었지만, 선선한 제주도의 밤바람과 흔들리는 형광등 조명은 이런 말들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때는 저 스스로 인생에 있어서 꽤나 큰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어요. 평생 책상 앞에서만 사는 삶을 멈춰야겠다고요. 대입하기까지 12년. 대학교에서 4년. 그리고, 공시생 4년. 중복된 시간이 있었겠지만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위에서 보냈어요. 좁디좁은 독서실 책상 안에서 조용한 적막 안에 둘러싸여 다른 사람들이 내뱉은 이산화탄소 냄새에 중독된 채 이게 맞는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와보니 안될 때를 알고 물러날 용기를 가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우물 안을 밝히는 해와 달을 보면서 나 스스로를 가뒀던 것이 얼마나 우스웠던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세상은 넓고 바다는 광활한데 너무 작은 세상에 살았다는 게 한심스럽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나와보니까 너무 좋은 것 같네요. 앞이 깜깜했었는데 짧은 2주였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이렇게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게 너무 큰 행복인 것 같습니다.”
-짝.짝.짝.짝.짝.-
모두의 이야기에 당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박수였지만 마음이 정말 후련했다. 말을 털어놓고 나자 사람들이 타이밍을 재고 있기라도 한 듯 ‘짠’을 외치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우리들의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모르는 채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기관장이 내려가고 나서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피곤이라는 감각을 잊어버린 듯 계속해서 떠들어댄 것은 이번이 처음은 듯했다. 그리고, 명함을 너머 새로 SNS 계정을 만들고 사람들을 팔로우했다.
“와.. 해 뜬다. 이제.”
서로의 이야기에, 지금 여기 있는 이 자리에 너무 몰입했는지 세상은 점점 밝아졌고 머리 위를 빛내는 형광등의 빛이 무색하리만큼 햇빛은 스스로의 존재감을 뿜어냈다. 아쉽지만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기로 했고,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러 공항으로 향했다.
“육지 가면 다 같이 봐요.”
“좋지. 재영아. 자주 보자. 우리 집 가깝잖아.”
“네. 형님. 들어가세요.”
“그래. 연락하자.”
비행기 시간이 빨랐던 준범형님은 먼저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윤지도 금방 자리를 떴고, 아직 비행기 시간이 조금 남은 은진님만 자리에 남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2주 하고도 반나절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는데도 할 말이 남아있었다. 마치, 묵언수행에 빠져있던 두 중생이 한 자리에 모인 것 만 같았다. 수년간 책상에서 인강선생님과 문제들과 대화했던 나와 시골의 한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만들며 적적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던 은진님은 혀가 뽑힌 귀신이라도 씌인 것처럼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까지 떠들었다.
“하아.. 아쉽다.”
“그러니깐요. 시간이 좀 더 있었어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
“재영님. 한 번 진짜 생각해 봐요.”
“어떤 거요?”
“와. 벌써 모른 척하는 거예요? 나랑 같이 일하자니깐요. 어차피 F&B 시작하면 일손 부족해요. 알바보다 돈 더 준다니깐.”
“하하하. 저야 영광이죠.”
“진짜 한 번 놀러 와야 해요.”
“당연하죠. 취업전선에 뛰어들면 꼭 제일 먼저 면접 보러 가겠습니다.”
“알겠어요. 연락해요.”
은진님이 손을 흔들며 자신이 가야 할 게이트로 향했다. 나도 은진님을 보내고 10분이 되지 않아 바로 게이트를 향해 집으로 향했다. 지갑에는 두툼하니 수많은 명함들이 있었고 확실하지 않지만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를 꽤나 많이 받았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 제의 자체가 감사했다. 기관도 여러 스타트업 대표님도. 그래도, 일단 하루, 이틀은 조금 쉬고 싶었다. 생각보다 2주를 빡세게 달려온 것도 있었고 어제 한숨도 자지 않고 사람들과 떠든 여파도 마구 몰려오는 것 같았다. 비행기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바다 위에 비치는 윤슬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작은 파도들이 하얀색 거품을 내며 검푸른 바다에 스크래치를 냈다. 아마, 내가 다시 집으로 가면 저런 수많은 파도들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았다.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당장 내일. 아니 당장 오늘 저녁만 하더라도 어떤 일이 내 앞에 펼쳐질지 몰랐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드디어 우물을 벗어난 것 같았다. 하늘에 뚫린 조그만 원안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종종 별을 보면서 세상의 전부를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우물 안 개구리가 드디어 드넓은 파도의 짠맛을 본 느낌이었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내방송을 맡은...”
기내방송이 들려오자 눈이 스르륵 감기는 게 느껴지며 코끝에서 바다내음과 같은 옅은 땀냄새가 느껴졌다. 자칫 불쾌할 수도 있는 그런 냄새였지만 이상하게 그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무언가를 열중하고 불태울 수 있는 열의가 남아있던 짧지만 길었던 제주에서 느낀 그 바다향을, 그 뜨거웠던 순간을 기억하게 해 줄 그런 향기였다. 내게 있어 이제 짭짤하고 비릿한 염분의 냄새는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생각보다 피곤하다. 쪽잠이지만 내일의 바다내음을 맡으려면 잠깐이라도 단잠에 빠져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