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귀여워 죽겠어
“어이구. 이뻐. 어쩜 이렇게 이쁠까?”
공원을 지나가다 자신이 귀엽다는 걸 아는 듯이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작은 강아지들과 그런 강아지들이 이뻐 죽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제는 귀여움과 이쁨이 생존에 유리한 방향이 되었구나.’
문명이 점점 더 발전하고 이빨을 드러낼 일이 없는 세상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무력이 아닌 다른 것이 생존에 더 적합해지는 것 같다.
동물보호법(13조의 2)
- 월령 3개월 이상의 '맹견'을 동반하고 외출 시 반드시 목줄 및 입마개 등 안전장치나 탈출을 방지할 수 있는 적정한 이동장치를 하게 돼 있고, 위반 시 최대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몸이 크고 이빨이 쎈 맹견들은 외출을 할 때 입마개를 하는 것이 의무화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크셔테리어나 푸들과 같은 조그만 강아지는 입마개를 안 하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물려봐야 죽을 정도로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하찮다고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그들의 공격성을 공격성으로 간주하지 않았기에 그런 기준이 생긴 것 같다.
“야. 걔들도 물면 아파. 쪼그만 게 승질을 어찌나 부리는데?”
“그렇게 승질까지 부리는 걸 왜 키우냐? 이뻐도 키울까 말 깐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애들이 얼마나 귀여운데? 그렇게 성질부리고 사고 쳐도 얼굴 보면 화가 싹 가라앉는다니까?”
“난 개 안 키워봐서 모르겠다.”
사실, 나는 개를 잘 키우지 않아서 모르겠다. 생존을 위해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던 늑대의 후예. 인간의 말을 잘 따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감각과 운동신경을 가졌기에 그들은 인간과 공존할 수 있었다. 외부에 침입자가 들어온 걸 알려주고, 인간이 다치기 전에 자신의 몸을 먼저 날리며, 사냥을 할 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던 개는 단순히 반려동물이 아닌 생존을 동반하는 친구 그 이상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으르르르르.-
“이게 어디서 이빨을...”
-깡!-
-깨갱!-
그러나, 지금의 녀석들에게 주인을 지키기 위한 보호본능과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생존방식과 완전히 거리가 멀어졌다. 순종적이고 귀여운 것만이 오히려 그들의 생존본능이 되고 말았다.
“그거면 된 거 아냐? 귀엽잖아?”
사실, 강아지가 귀여워도 난 막상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는 더더욱. 이전에 다른 강아지를 하루 돌봐준 경험이 있는데 그때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면 안 된다는 확신이 섰다. 나 하나도 키우기 어려운 세상에서 강아지까지 키운다는 게 벅차기도 했고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들을 보니 나를 위해 강아지를 키우는 게 아니라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 집에 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랄까?
“니 애가 아니라서 그래. 내 애면 얼마나 귀여운데.”
하긴. 뭐 내가 직접 안 키워봐서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는 존재 또한 현세대에 가장 살아남기 좋은 재능과 요건이 귀여움과 이쁨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말이다.
“와... 이거 뭐야? 진짜 너무 이쁜 거 아니야?”
“어때요? 이거 핏 깔끔하죠? 요즘은 이런 게 대세기도 하고 이 정도는 입어줘야 또 느낌이 살거든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부담이 줄어들면서 인생의 지향점은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멋지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다가 혹은 SNS에 올라온 이쁘고 잘생긴 누군가를 보면 자연스럽게 동경하게 되는 그런 문화가 자리를 잡았고 가지고 있는 것보다 보여지는 게 더 우선시 되는 장면이 현실에서 자주 나타났다.
“선생님은 할만하냐?”
“힘들어. 애들이 우리 때랑 달라.”
“왜? 뭐가 그렇게 다르길래?”
“하는 짓도 그렇고. 노는 것도 그렇고. 수업시간에 코인 하는 애들도 있고, 쉬는 시간만 되면 뒤에서 동영상 찍고 그걸로 틱톡이랑 릴스 올리면서... 하여간 진짜 다르다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자기 PR시대라면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최근에 주위를 둘러보면 이제 좀 그만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알고리즘이 무엇인지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몇몇 신화적인 사례들을 보며 복권보다 희박한 확률게임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보면 시대가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보면 지는 안 그런 줄 알겠네.”
“내가 뭐?”
“너 SNS 하잖아.”
하지. 하긴 하는데... 그래. 할 말이 없긴 하네. 어쩌면 이렇게 내 생각을 가감 없이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또한 누군가가 봤을 때는 변화한 세대의 한 조각일 수 있겠지. 얼굴을 드러내고, 몸매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 속살 아래 내면과 정신이라는 더 깊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거니까.
-타다다다닥.-
-쓱.쓱.-
아침이 되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사는 모습들을 보면 다들 저마다의 방법으로 나름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도로를 깨끗하게 관리해주는 환경미화원부터 9시가 되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며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들. 사람들의 식사를 위해 뜨거운 불 앞에서 땀을 흘리며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과 뜨거운 태양 아래서 누군가가 살 집을 만들기 위해 현장을 뛰어다니는 사람들까지. 작은 화면 속에 화려한 불빛을 뽐내지 않고, 굳이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귀여움을 떨지 않더라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생존본능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것보다 더한 가치가 있나? 먹고사는 것도 결국 돈을 벌어야 할 수 있는 거잖아. 쥐 이야기 몰라?”
“쥐 이야기?”
[ 존. B. 칼훈의 유니버스 25 실험 ]
존. B. 칼훈의 유니버스 25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정확한 출처는 모르고 유튜브에 떠도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포식자가 없는 쥐들은 자신들의 유토피아에서 계속해서 개체수를 증가해 갔지만, 결국 그 수가 증가한 쥐들이 어느 한 곳으로 과밀화되는 현상을 보이며 점점 영역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경쟁에 지친 이들은 점점 그 경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자신을 꾸미는데만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자식들을 돌보기를 포기하며 차후에는 임신 자체를 포기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름 신박하면서도 꽤나 공포스러운 이야기였다.
“이거 지금 우리나라 이야기 아니야? 그냥 동물농장처럼 쥐에 빗대서 우리 사회를 말해주는 것 같은데?”
댓글을 보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현 상황을 보면서 어원 그 자체의
‘계몽’을 자꾸만 느끼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어둠을 열어낸다.’
‘어둠 속에서 빛을 연다.’
‘무지에서 이성을 깨닫는다.’
[ 영화 '타이타닉' ]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직전에 가장 먼저 쥐들이 그 위기감에 반응하고 배를 탈출하려 했듯이, 어둠이 내린 밤 보이지 않는 침입자가 우리의 보금자리로 다가오는 것을 개들이 느꼈듯이 생각보다 이 세상은 우리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통해 계몽이라는 힌트를 주고 있을 수도 있다.
“니가 지금 이쁘고 귀여울 때냐? 너희 지금 자멸하기 직전이야.”
운명이라는 존재와 세상이라는 객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아마 우리에게 지금 이런 경고를 보내지 않았을까? 이제 그만 귀여우라고. 귀엽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그러나, 우리는 빙산에 부딪혀봐야지 그 사실을 깨닫겠지?
“야. 좆됐다. 빨리 도망쳐.”
“뭘 도망쳐.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매한가진데.”
영화 속에서 봤던 각자들의 그 생존의 방법마저도 마치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네... 흠... 뭐지? 설마 이런 게 데자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