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의 귓속말

겨울

by 심색필 SSF


소파에 앉아서 TV에 나오는 배트맨 영화를 보며 개미와 수다를 떨다 무언가 번뜩이는 것을 느꼈다.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반응해주지 않는 이 사회체제에 대한 레지스탕스가 되고 싶었다. 당장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은 잡히지 않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처럼 소외받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말을 할 용기가 없어서 매번 당하고만 살았던 사람들에게 보다 큰 용기를 줄 수 있는 상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근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그 혁명가 같은 사람은?”

“뭐. 나도 모르지.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

“어디 가게?”

“그냥 머리가 아파서. 산책 좀 다녀오게.”


매일같이 집에만 박혀있으니, 순간 너무 답답했다. 밖에 나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집에만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뜨거운 햇빛에 아스팔트 위에서 아지랑이가 흐물흐물 올라오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들의 색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을 느끼고, 개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동네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누군가 내 뒤통수를 때리며 다가왔다.


“어...현주환?”

“이 새끼. 너 깡다구 좀 있더라.”

“아...아니.”

“크크크. 괜찮아. 그 새끼 원래 족밥이었어.”


Firefly A teenage Korean male wearing earmuffs is shown from behind in his school uniform against an.jpg


녀석은 한때 친구였던 황현구가 아직 겨울도 안 왔는데 귀마개를 하고 있다며 나한테 친구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녀석은 타인이 느끼는 고통 따위는 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더 강하게 보이게 하려는 방편이나 그냥 조롱거리로 만들어 농담 따먹기 용도로 사용하기만 할 뿐.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황현구는 현주환 이 자식에 비하면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니었다. 전학 오자마자, 학교의 구심점 있는 인물로 올라서기 위해 나를 제물처럼 사용한 쓰레기 같은 놈.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자기 아래 있는 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만든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내가 잘못된 사회제도를 붕괴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려면 가장 먼저 이 자식에게 사과를 받아내야 했다.


“왜 그랬어?”

“어?”

“그때 왜 그랬냐고?”

“뭐래? 이 미친새끼가.”

“왜 전학 온 첫날. 내가 김진영을 나쁜 놈이라고 말했다고 거짓말했냐고?”

“이 새끼가 돌았나? 왜? 황현구 한 번 바르고 나니까 나도 좆으로 보이냐?”

“사과해!”

“어. 사과할게.”


현주환은 사과한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주먹을 던졌다. 처음 녀석에게 말대꾸를 하고 나서 날아온 주먹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녀석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코에서는 그때처럼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고, 녀석은 쉬지 않고 내게 주먹과 발길질을 뿌려댔다. 황현구의 폭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아팠다. 왜 황현구 그 미친놈이 현주환 말 몇 마디에 그렇게 쩔쩔매며 아무 저항 없이 모임을 나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황현구의 주먹은 그래도 좀 버틸 만했지만, 녀석의 주먹질은 순간이라도 한눈팔면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정신이 날아가려고 할 때마다 다급하게 절규하는 개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힘내. 정신을 잃지 마. 기절하면 안 돼.”


개미의 목소리를 듣고 현주환의 난폭한 주먹질에 날아갈 것 같은 정신을 끝끝내 붙잡았다. 한참을 신명 나게 때려대던 녀석은 결국 제풀에 지쳐 숨만 헐떡이고 있던 내게 침을 뱉고 그대로 다시 갈 길을 떠났다.


“괜찮아? 일어나. 저런 놈한테 무너지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겨내지 못하더라도 쓰러지지는 마. 일어나. 주먹으로 못 이기겠으면 다른 수라도 써봐. 이겨야지! 이겨내야지!”


개미의 말이 맞았다. 지금 여기서 쓰러져있으면 나는 결국 누군가 알아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간신히 몸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옆에 주먹만 한 돌덩이 하나 보였다.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이다! 지금 저질러야겠구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한 손에 돌덩이를 쥐고 가쁜 숨을 몰아치며 녀석에게 소리쳤다.


“야! 야! 이 씨발새끼야!”

“하아...이 새끼가 아직 덜 처맞았나?”


녀석은 다시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상체를 올리고 있는 나를 보며 녀석은 가소롭다는 듯 주먹을 내리치려 한쪽 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때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녀석의 머리에 휘둘렀다. 돌덩이에 선명한 핏자국이 생기며, 황소같이 눈을 부라리던 녀석은 흰자위만 드러낸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이 자식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다. 그간, 내게 있었던 그 모든 악몽들의 시작. 자기를 강자로 만들기 위해 나를 먹이사슬 가장 아래로 끌어내린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 지금까지 내가 당했던 수모와 치욕에 대한 분노를 손에 있는 돌에 담아 녀석을 으스러뜨렸다. 한참 동안 돌덩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고 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Firefly Someone is holding a stone with red ink in one hand. 397581.jpg


“너..너...백의민. 이 미친새끼.”


현주환과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김진영이었다. 힘에 굴복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나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인간. 그러나, 녀석은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망가진 현주환의 얼굴을 보자 겁에 질려 꽁무니를 뺐다. 드디어 한 발자국 나아간 것이다. 먹이사슬 피라미드라는 이 거지 같은 사회구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첫 번째 반항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제 오후. 아파트 주변의 한 공원에서 같은 학교 학생을 돌로 찍어 죽인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평상시 거의 안면이 없던 두 학생은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서로에게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니나 다를까. 나는 다음날 조간신문과 뉴스를 장식하는 화제의 인물이 되어있었다. TV와 핸드폰에 나오는 모든 뉴스는 나를 주목했고, 나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명한 인간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플래시 세례가 터졌고,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경찰은 혹여나 내가 다칠까 봐 주위를 감싸며 나를 보호해 주었고, 나는 어딜 가던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저는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살고 있는 개미들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대신 싸우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저 백의민이 해내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항상 저를 묵묵히 응원하고 지지해 준 제 친구 개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를 쓰는 기자들과 대중들을 위해 멋진 연설을 쏟아내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이전보다 더 많은 플래시 세례를 보내며 소리를 질러댔다.


Firefly A Korean teenager is walking down the red carpet with his face exposed after being caught by (1).jpg


“백의민. 보고 있어? 사람들이 다 너를 원하고 있어.”

“어. 개미야. 고마워. 네가 내 인생을 바꿨어. 네가 아니었으면 못했을 거야.”


개미와 나는 경찰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혹시나 모를 사고에 대비한 철창이 달린 경찰차에 올라탔다. 경찰차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은 황현구의 귀를 찢고 처음으로 손에 피를 묻혔던 그날의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합리한 세상에 도전해 승리한 자들만이 가진 영광스러운 웃음과 미소.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를 닮은 그 환한 미소는 내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대변해 주는 듯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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