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글자라도 놓치면, 끝을 내지 않은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 탓에 책에 적힌 모든 글자들을 다 훑는 나를,
가장 멈추게 하는 순간은
멋진 문장을 발견한 순간도 아니고,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서 오는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도 아니고,
여전히 모르는 부분도 아니고,
큰 여백의 중간즈음에 간신히, 또박또박 적힌 아주 짧은 말.
"누구누구 에게"
난 이걸 볼 때마다 항상 그 누구누구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한다.
좀 명확하게 "to"라고 표현되는 이것도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심정적인 황홀감을 줄 때가 많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것을 하였다는 데서 오는 감동은 적지 않다.
생각해보니, 내가 "to"를 가장 많이 쓸 때는 편지를 쓸 때다.
항상 편지를 쓸 때 내가 해오던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진한 색의 싸인펜으로 편지를 가장 맨 위에,
아주 크고 그래서 잘 보이게 [TO. 누구누구]라고 쓰는 것이다.
누구누구에 해당하는 말은 반드시 나만의 애칭이어야 하고,
그런 내 습관은 사실 편지를 딱 여는 그 순간 그 누구누구만의 것이란 걸 굳이 표현해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참 해주는 성격은 못된다.
너에게 주는 것이란 것을 그렇게도 티나게 표시하고 싶었던 모양.
내가 그렇게도 감동을 받았다고 외치는 책에 적인
'누구누구에게'와 왜 나의 '누구누구에게'가 주는 무게는 다를까.
아마도 책에서의 '누구누구에게'는 번역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랄까.
나는 항상 그것을 보면서 단 한번도 'to'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for'였다.
'for' 즉, '누구누구를 위해'라는 것이 난 얼마나 대단한 건지를 새삼 나의 편지 습관에서 깨달아버린 것이다.
난 단 한번도 나의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한 편지를 쓴 적이 없고,
'내가 너에게 쓴다'는 것만 강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서 본 그 글귀들이 가진 무게감이 나의 시선을 가두어두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은 쉽지 않고,
행여나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그것을 내세우는 경우가 다분하다.
'give and take'는 야박하지만, 속 편하다.
사실 어쩌면, 속이 좁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유행처럼 쿨하지 못한 게 대부분이어서
절대로 'give and give'를 하고 맘 편하게 누울 수가 없다.
내가 상대에게 'for'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to'를 했을 때,
나는 상대에게 똑같은 것을 받아야만 발 뻗고 잘 수가 있는 것이다.
이로 보자면, 누구누구를 '위한' 것은 과연 얼마나 완벽한 쿨함의 경지에 올라야, 아니면 온전히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것도 아니면,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감히 쓰일 수 있는 것일까.
결국, 슬픈 결말에 도달하는 수밖엔 길이 없다.
그래서 난 '위할' 사람이 있나.
더 슬픈, 이것이 슬퍼서 날 결국 속 좁은 인간이게 하는,
그러면 날 '위하는' 사람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