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극장전>을 보고.
언제나처럼, 영화 속 현실 - 이 말은 언제나 묘하다. 아무리 사실주의 영화라고 하더라도 촬영이나 편집에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개입된다는 점에서 어쨌거나 영화 속 현실은 진짜 현씰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인 줄 알고 집중했던 초반의 이야기는 그저, 영화 속 현실에 존재하는 영화일 뿐이었다.
아직도, 현실인 것만 같은 찝찝함과 그래서 그 기대로 후반의 이야기에 무슨 반전이 있길 바라는 은근한 마음이 나머지의 시간을 채운다.
하지만, 초반은 여전히 영화 속 현실의 영화이고, 후반이 결국 영화 속 현실이다.
그래서 집중하며 인물의 대사와 표정, 관계에 대해 열심히 생각했던 초반의 시간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전혀.
우리의 현실에서 영화가 일상에 침투하지는 못하나, 그러나 다시 일상을 매만질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상원과 영실의 이야기 또한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 초반의 이야기에 대한 후반, 영화 속 현실이 중요하다.
초반의 이야기를 대하는 후반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 넘쳐 흐르는 수 많은 이야기들을 대하는 태도와 흡사하다.
우리 주변의 수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의 모습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는 일이 사실은 전부다.
영화의 동수 또한, 우리가 연관 짓는 방법 중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 즉 '저것은 곧 나의 모습'이라는 방법에 충실하다.
나름 친하게 지냈던 선배 상원의 영화 속 이야기가 곧 자신이 선배에게 했던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동수는 안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성공한 감독이 된 선배와 아무것도 딱히 이루지 못한 자신을 비교하며, 동수에게 결국 선배 상원은 자신의 이야기를 훔쳐 간 '도둑놈'이다. 동수의 눈에 영화 속 영실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이기 때문에 현실의 배우 영실도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여자다. 또, 동수 본인을 사랑해줄 여자다.
영화 속처럼 동수와 영실 사이에 '그 어떤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영실에게 끊임없이 다가간다. 결국 영실을 꼬시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동수가 영실에게 "같이 죽을래요?"라고 말하는 순간,
현실은 영화의 이야기와 멀어진다.
영실은 같이 죽자는 동수에게 어이없는 눈길로 "영화 잘못 보셨네요"라고 말한다. 영실에게 동수는 그저 애매한 배우인 자신을 하룻밤 상대로 꼬셔보려는 뻔한 남자에 불과하다. 그런 자신에게 같이 죽자고 하다니.
이 남자, 자신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인 듯 착각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불쌍한,
자신의 이야기를 가져다가 성공한 감독을 도둑으로 내모는,
그 완성품은 자신의 것인 듯 또 착각하는,
어이없고 재수없는 남자잖아.
병원 앞에서 다시 만났을 때 영실에게 동수는 이제 가여워지기까지 한다. 이 어린애같은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이제 그만 뚝!"
하지만 그 때까지 동수에게 영실의 그런 행동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영실이 배우의 신분에서 별로 잘날 것 없는 무명 감독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뚜벅뚜벅, 선배 상원의 병실로 들어갔을 때 상원이 힘겹게 하지만 계속 "살고 싶다"고만 그에게 외칠 때,
그에게 영화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영화다.
그러니까 영화를 대하던, 현실을 대하던 그는 이제 "생각을 해야 한다".
이야기의 '성공' 조건에 항상 자리하고 있는 건 '공감'이다.
이야기를 접할 때, 그것이 낯선 무언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낯익어서, 어쩔 때는 누가 훔쳐보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한 이야기여야 오래 남는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치밀함이 있다.
홍상수의 <극장전>이 유난히 내게 당혹스러움을 안겼던 이유는
'공감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마는' 나를 목격하게 한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