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부유한 채, 도무지 자리잡지 못하는 생각들을 붙잡아 둘 요량으로 사전을 뒤적였다.
배우란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 등장하는 인물로 분장하여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보니, 문득 또 연기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연기는 “배우가 배역의 인물, 성격, 행동 따위를 표현해내는 일”이란다. 결국, 인물을 제대로 그려내어, 보는 사람이 극의 흐름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겠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화면 속 사람이 ‘배우’라는 것을 잊게 하고, 어느 곳에 존재할 ‘어떤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전해줄 때 ‘역할에 충실했다’고 말해질 수 있다.
‘배우’가 아니라 ‘인물’이 보여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그 배우가 멋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 배우’는 실패한 연기를 한, ‘극의 방해자’가 된다.
오히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극 중 인물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여전히 그 이야기가 현실 속에서 이어져나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그 배우’는 성공한 연기를 한, ‘극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망상에 빠지게 하는 배우란 무엇일까.
배우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결국, 그것은 연기력일까.
외모는 출중한데 연기력이 떨어지는 배우. 외모는 떨어지는데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 외모와 연기력 모두 뛰어난 배우. 외모, 연기력 모두 떨어지는 배우.
이렇게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그리고 간편하게 외모와 연기력을 기준으로 배우를 나누곤 한다.
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배우에겐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슬픈 질투가 섞인 찬사를 보내고, 비록 외모가 떨어져도 연기력을 갖춘 배우에겐 ‘개성 있는 연기파 배우’라는 어깨가 으쓱해지는 꼬리표를 달아준다.
결국, 배우들에겐 연기력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연기력’이라는 잣대 하나만 가지고 배우를 바라보려니 무엇인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
래서, 다른 한 쪽에서 배우를 나누는 ‘외모’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생각해본다. 배우의 얼굴이란 무엇일까.
다시. ‘알맞은’ 배우의 얼굴이란 무엇일까.
시작은 콧구멍이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며 계속 눈에 거슬렸던, 아버지 역할을 맡은 배우의 유난히 작은 콧구멍.
이제까지의 중얼거림, 배우의 조건과 얼굴에 맴돌게 된 생각의 처음에는 콧구멍이 있다.
<빌리 엘리어트>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게리 루이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그 사람은 ‘배우’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나를 이야기 가운데 던져 놓아야 했지만, 그 놈의 콧구멍 때문에 임무를 실패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콧구멍 걱정만 할 뿐이었다.
평소에 항상 코가 막혀 있어서 숨쉬기가 힘든 나는 클로즈업 되는 그의 얼굴 안의 콧구멍을 보며 같이 숨이 찼고, 머릿속에 ‘저 사람도 평소에 숨쉬기가 힘들겠다’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결국, 나는 그 콧구멍 걱정 때문에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내 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난히 콧구멍이 작은 배우가 아버지로 등장하는 영화’로 전해져 버린 것이다.
‘나무만 보지 않고 숲을 보고’싶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계속 되는, 온전히 영화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이 찝찝함.
이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기 위해 <빌리 엘리어트>를 본 사람들에게 그 배우의 콧구멍을 말하며 동의를 구했다. 모두에게 콧구멍이 눈에 거슬려서 그 배우 자체가 ‘미스 캐스팅’이길 바라면서.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것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돌아오는 것은 그저, ‘특이하다’거나 혹은 ‘뭘 그런 걸 가지고’라는 말뿐이었다.
오히려 나는 그 때는 그런 반응이 너무 의아했지만, 지금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배우의 조건도 그렇지만, 특히나 얼굴은 주관적인 대상이니까.
‘모두에게’ 알맞은 배우의 얼굴은 있을 수 없고, 단지 ‘나에게’ 알맞은 배우의 얼굴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나는 ‘지극히 주관적인 배우의 조건 : ‘얼굴편’을 작성해본다.
기준은 절대로 얼굴의 한 특정 부위에 나의 시선을 빼앗지 않는 것. 그래서 온전히 극의 흐름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얼굴.
우선, 내게 가장 중요해진 코. 1. 코의 모양은 상관없지만, 콧구멍만은 반드시 지름이 1cm 내외여야 한다. 2. 눈은 크기에 상관없이 쌍꺼풀 크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그 두께가 8mm보다 짧아야 한다. 3. 입 꼬리는 처지지 않아야 하며, 윗 입술이 약 1cm가량 되는 두꺼운 입술은 알맞지 않다. 4. 피부는 색에 상관없이 깨끗하면 된다. 혹여 뾰루지가 났다간 바로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화면에서 배우의 얼굴을 볼 때 그만큼 신경 쓰이는 게 없다).
만족스럽다. 적어놓고 보니, 생각보다 내 머릿속의 ‘알맞은’ 배우의 얼굴은 까다롭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조건을 모두 갖추었지만, 어디선가 나의 시선을 빼앗을 예상치 못한 얼굴을 가진 배우가 등장할 것이 예상되어, 앞으로도 조건은 계속 늘어날 것도 같다.
내가 이런 편파적이고 우스운 리스트를 작성한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콧구멍 때문이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아주 작은 것이지만, ‘어떤 한 이야기’를 전해주려 했던 영화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마치고 영화를 대했던 나의 사이에 무엇보다 큰 벽이 되었다.
‘알맞은’ 배우의 얼굴은 모든 사람의 수만큼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각자만이 가진 배우의 조건 때문에 결국 모두의 극은 만들어질 수 없게 되겠지, 라며 관대해지려다가도, 또 결국 어디선가 ‘또 다른 콧구멍’을 만나게 되겠지, 라며 홀로 한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