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홍, <생사의 장>을 읽으며
나는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샤오홍의 <생사의 장>이 내가 직접 책을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첫 중국 소설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그래서 부끄러움을 동반했다.
이 첫경험에 대해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말은 내 책장에 중국 소설이 꽤 자리잡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평소에 최대한 많고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어느샌가 내가 보고 싶어하는, 비슷한 것들만 보고 있었다는 반성도 해 볼 수 있겠다.
‘한국 문학’, ‘일본문학’, ‘프랑스 문학’처럼 나라를 기준으로 문학 작품을구분 짓는 것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 워낙 무심한 탓이 클테지만, 그보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라보다도 어떤 작가만이 가지는 특징을 위주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여기서 괜시리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생사의장>이라는 작품이 소설과 역사라는 현실적 상황이 결코 떨어져 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애써 피해오려 했던 그 관점에 나를 세웠기 때문이다.
샤오홍의 <생사의 장>은 ‘동북지역출신 여성 작가의 대표적인 항일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짧은 소개 안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먼저, 1931년의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중국 침략을 상징하는 ‘동북지역’에서 온 그녀가 동북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주류적 시각에서 비껴간 주변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즉, 상하이에서 주변인이었던 그녀가 그 주변의 시선으로 주변(동북지역)을 보여주고 있는 셈인 것이다. 한편, 샤오홍은 특히나 ‘여성’이라는 점은 부각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출판사가 작가를 소개하는 첫 머리에 애써 그녀의 개인사를 비극적으로 적어두며, 샤오홍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인생사를 구체적이거나 단 몇 줄이거나 결코 빼놓지 않는다.
그녀의 짧은 생애는 온통 참혹한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남존여비사상에 젖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1930년 하얼빈 제일 여자중학교에서 제적당한 뒤 당숙 집에서 살던 중 소작농들 편에 들다가 당숙과 아버지에게 살해당할 뻔했으며, 집을 나와 하얼빈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에는 동거하던 두 남자에게 차례로 버림받고 사창가에 팔릴 뻔하기까지 했다. 두 번째 남자의 아이를 싸구려 병원에서 낳았는데 키울 능력이 없어 아기를 남에게 주었고, 그 뒤 세 번째 남자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그가 바로 소설가 샤오쥔이다. (중략) 그러나 샤오홍 부부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아 자주 다투었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1940년 샤오홍은 혼자 홍콩으로 가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폐병이 악화되어 1942년 죽음을 맞고 만다.
사실, 작가로서의 샤오홍보다도 여성으로서의 샤오홍의 비극적 인생사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그녀의 작품을 읽는 순간에까지 이어지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1930년대의 중국에서의 여성의 삶을 떠올릴 때, 남성이 대부분이었던 작가라는 직업군에서 여성이 그려낸 이야기라는점 자체가 상당한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굳이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아도, 모든 작가들은 각자의 개별적인 삶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품 속에 녹아 그려낸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떠올려볼 때에도, 유난히도 여성이기 때문에 겪었던 일들, 여성만이 겪을 수 있는 일들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샤오홍의 작품에서 ‘여성’이라는점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생사의장>은 간단하게 ‘항일문학’으로 말해지곤 한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잔혹한 만행으로 인한 고통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항일문학’을 염두해두고 책을 펴고 읽어나가다 보면 조금은 당황할지도모른다. 생각만큼 항일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있지 않으며 실제로 소설의 마지막 3분의 1에 가서야 일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생사의 장>을 여는 서문에서 루쉰은 이 소설에서 ‘불행히도’ 무엇인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 불행일까.
그것은 아마도 알고 싶지 않았던 어떤 세계를 마주한 순간이라는 불행일 것이며,
그 세계가 한 사람의 섬세한 관찰에서 피어난 진실임을 아는 깨달음이라는 불행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의 불행 자체에 우리가 인물들과 함께 서 있을 때, 각기 다를 형태의 불행을 떠안고 책을 덮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루쉰이 우리에게 던진 이 예언에서 벗어나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샤오홍의 <생사의 장>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말해졌고, 그것은 대부분 당시 중국의 역사적 상황, 여성으로서의 삶과 결부되었다. 역사적인 지식이 사실은 거의 전무하다고볼 수 있는 나로서는, 그러한 것보다도 소설 내적인 측면에서 작품이 가지는 특성에 매료되었다. 샤오홍이라는 인물을 최대한 배제하고(물론 전적으로 그런 관점을 벗어날수는 없겠지만) 작품을 보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샤오홍의’ <생사의 장>이아닌, ‘그냥’ <생사의 장>을 보려고 한다.
샤오홍의 <생사의 장>에서 누가 주인공이냐고 묻는다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의 이름도 쉽게 댈 수가 없다. 얼리반, 진즈, 왕씨 아주머니가 떠오를 수는 있어도 소설의 중심에 놓여있는인물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저 특별한 순서 없이 제 맘 가는대로 저 멀리서 인물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것과 같는 느낌만을 받게 된다. 루쉰이 서문에서 서사와 풍경 묘사가 인물 묘사보다 뛰어났다고 밝힌 것처럼, 사실상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놀랍다고 느끼는 순간은 샤오홍이 그려낸 마을이 눈 앞에서 천천히 그려지고 완성되고야 말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이 태양빛에 눈 따가워하고, 차분히 바람을 느끼고, 그 바람을 따라 밀의 냄새를 맡고, 어느샌가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황량한 마을의 무음을 듣는다.
인물속에서 주인공을 찾지 못한 실패를 딛고, 차라리 ‘태양’이 주인공이라 말하고 싶다.
대개 빛은 생명, 희망, 구원 등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어둠은 죽음, 절망, 고통등의 부정적인 이미지 갖는다.
하지만 <생사의 장>에서 빛은 인물들의 고통을 배가시킨다.
농민으로 살아가는 마을사람들에게 태양빛은 ‘일을 해야한다’고 알려주는 알람과 다름없고, 그 빛이 더 따사로울수록 벗어날 수 없는 일의 굴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흐르는 땀을 닦는것 뿐이다.
곰보댁은 그늘 아래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정오의 채소밭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고, 남비들만이 날개를 태워버릴 듯 뜨거운 햇빛도 두렵지 않다는 듯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꽃을 지켰다. 모든 것이 숨어버렸다. (중략) 곰보댁의얼굴에 땀이 구슬처럼, 콩처럼 곰보 자국 하나하나를 적시며 흘러내렸다.곰보댁은 나비가 아니므로 날개가 없었고, 곰보 자국만 선명했다.
마을 전체가 불 속에서 질식해갔다. 정오의 태양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추석이 지나자 밭은 황량해졌다. 태양은 점점 더 높은 곳에서 우울한 빛을 내리비추고, 음습한 공기는 밭 여기저기를 쓸고 다녔다.
창밖에서는 햇빛이 창문 가득히 뿌려지고 있었고, 집 안에서는 여자가 출산으로 인해 탈진해있었다. 농촌의 초록 세계에서 사람들은 땀방울을 뿌리고 있었다.
저녁이면 강가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모기떼는 강가 풀숲에서 출발해 시끄럽게앵앵거리며 대열을 지어 한 집 한 집 휩쓸고 다녔다. 낮에는 햇빛이 타는 듯이 뜨거워져 사람들의 피부를태웠다. 여름이면 농사짓는 사람들은 악독한 폭군을 원망하듯 태양을 원망했다. 온 들에 거대한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일본군이 마을에 와서 밭이고 사람이고 모든 것을 망가뜨려버린 후 쯤에 와서 ‘태양’은 소설 안에서 숨는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하는 것은 더 이상 ‘태양’이 아니고,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휘집고 다니는 일본군이며, 또 사람들간의 관계이다. 마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던 폭군(태양)이 ‘굳이’ 자신이 나서지않아도 망가져가는 마을을 그저 지켜보는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괴롭히던 ‘태양’이 사라졌다고 해서 결코 희망적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할 일을 대신할 또 다른 폭군이 등장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일본군이 마을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양’이 나타날 테니까.
마을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의 밭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삶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다시 태양이정해준 시간에 맞춰 땀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생사의 장>은 단순하게 ‘항일문학’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군에 의한 고통과 그것에 맞서려는 사람들의 의지는 자신의 국가를 지켜내려는 민족주의적 행동이 아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먹고 살 수 있었던 수단인 농사를 더 이상할 수 없는 데에 그 화살을 일본에게 돌렸을 뿐이다. ‘태양’이 준 고통은 그래도 어쨌거나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당근을 던져 주었다. 하지만, 일본이 준 고통은 그 어떤 것에도 위안을 삼을 수 없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저히 고통이다. 그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는 익숙한 고통에서 갑작스럽게 다른 고통으로 넘어간 것이다. 즉, 마을 사람들은 예전부터 고통받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의 빠름에지친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막연히 자연과 가깝다는 이유로 좋을 것만 같은 농민들의 삶의 고통이며, 그정점에 ‘태양’이 있다.
염소 한 마리가 큰길가에서 느릅나무 뿌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성 밖으로 길게 뻗은 큰길에는느릅나무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 마치 일렁일렁하며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우산을 쓰고있는 것 같았다. (중략) 아이 하나가 채소밭을 천천히 걸어갔다.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 거대한 버섯을 연상시켰다. 나비를 잡으려나? 메뚜기를 잡으려나? 아이는 정오의 태양 아래 있었다. (중략) 채소밭 갓길 좁은 땅에는 들나물이 나 있었다. 이 짧은 길을 지나면 바로 얼리반의 집이었다. 집 앞에 심어진 백양나무잎이 나풀거렸다. 얼리반은 매일 백양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백양나무 잎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듣고, 어떻게 나풀거리는지 감상했다. 백양나무는 매일 똑같았고…… 얼리반도 매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 그는 처음으로 그 습관을깼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고, 다리 저는 게 더 심해졌다. 한 발짝 한 발짝 구덩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생사의 장>에서 ‘태양’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인간과 대비되어 그려진다. 소설의 문을 여는 첫 부분에는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진다. 길 옆으로 길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한 아이가 걸어가고, 한 켠에는 염소가 그늘 아래에서 유유히 쉬고 있다. 하지만, 그 풍경과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간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갑작스레 인물들의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연과는 무관한, 아니 어쩌면 자연이 주는 고통을 얼리반과 곰보댁은 처참하게 감내하고있다. 소설에서 자연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아름답게 비유되고 있고, 또구체적이며 감각적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이어지는 인물에대한 묘사는 냉정하기 그지 없다. 자연과 인간의 이러한 대비적인 묘사는 마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더욱부각시켜주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샤오홍이 사용하는 묘사의 구체적인 대비는 ‘색’이다. 유난히 <생사의 장>에서는 다양한 ‘색’을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머릿 속에 소설 속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된다. 소설 속에서 사용되는 색들은 주로 자연의 색이다. 붉은 색은 태양의색이고, 푸른 색은 녹음의 색이며, 노란 색은 곡식의 색이다. 소설 전반에 드리워진 이 색들의 향연은 자연의 색인 동시에, 마을사람들에게 곧 삶의 터전 자체의 색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 자연은 곧 고통을 주는 주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연의 색들은 고통과죽음의 색과 같다. 붉은 색, 푸른 색, 노란 색이 인간에게 다가왔을 때, 그것들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비극을 더 극적으로 그리는 장치가 된다.
노란색, 아니 누르스름한 빛깔의 밀밭에는 짤막한 그루터기들만 남아 있었다. 이런 밀밭은 멀리서 보면 사람을 슬프게 한다.
얼리반의 푸른 얼굴이 염소를 잃어버린 뒤로 더욱 시퍼레졌다.
동쪽 수수밭에서는 해가 구름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선명한 붉은빛이 붉은 수정 같기도하고, 붉은 꿈 같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수수밭이 작은숲처럼 위엄에 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선선한 아침 시간을 놓칠세라 각자 밭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
채소밭에는 쓸쓸한 토마토들이 빨갛게 익었다.
태양은 피처럼 어지러운 빨간색이었다.
태양은 거대하지만 빛이 없는 검붉은 색의 둥근 바퀴로 변해 사람들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혼미상태에 빠진 마을에는 천재지변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가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자연이 내는 강렬한 원색들은 이처럼 사람에게 고통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생사의 장>에서 ‘붉은 색’은 특별하다. ‘붉은색’은 곧 ‘피’를 상징하며, 그렇기에 소설에서 죽음과 맞닿아 있는 색이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늙은 말을 팔기 위해 힘겹게 간 도살장에서 왕씨 아주머니는 피로 물든 그 곳을 힘겹게 벗어나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하얼빈으로 떠난 진즈의 눈 앞에는 머지 않아 남자에게 몸을 내줄 불길한 미래를 예상하 듯 붉은 스카프를 맨 러시아 여자를 보며, 일본군에게 맞서기 위한 조직의 이름은 ‘붉은 수염’이고, ‘애국군’이라는글씨는 붉게 쓰여져 있으며, 모든 것을 잃고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직 일본군에 대한 반발심 뿐인 짜오산은 거대한 붉은 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밖에도 마을 곳곳에퍼져버린 죽음 옆에는 붉은 색, 곧 피가 묻어있다. 고통이 심해지면서 죽음에 가까이 가게 되는 마을을 보여주고 있는 <생사의 장>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어내려갈수록 ‘붉은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책을 덮은 후에도 점점 피의 냄새, 죽음의 냄새, 그 비린내를 떠나보내기 힘들다.
마을사람들은 내걸린 일장기를 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몰랐고, 자오싼은 모든 것을 잃은 후에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일본에 대한 저항이라는 밧줄을 잡았을 뿐이다. 그는 국가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고, 중국인이라는 것마저도 잊고 살아온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항일 행동이 국가를 지켜내기 위한 민족주의적 관념에서 기반되었다고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 중 어느한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삶,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오지 않았다. 나아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주체적인 삶이 의미하는 바를 고민할 여지조차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의 염소는 오히려 인간들이 취해야 할,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얼리반이 소설 처음에서 끝내 염소를 찾지 못하는 것은 끝내 자신만의 방식을 찾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자오싼에게 정치사상이 없다고 타박받던 얼리반은 소설 끝에 마지막까지 염소를 쓰다듬으며 흐르는 눈물과 함께 마을을 떠난다. 이러한 얼리반의 모습은 그의 절뚝거리는 다리와 함께 그나마 가장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던 그마저도 다른 이들의 방식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비극이다.
그것은 아득한 곳에서 영원히 멈추지 않을 울음소리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