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무역'과 '착한 소비'

by 이그저


우리에게 공정무역이란 말은 더 이상 생소한 용어가 아니다.

간혹 뉴스에서 공정무역을 행하는 사례나,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고, 환경이나 인권과 관련한 행사에서 공정무역은 빠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공정무역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공정무역’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우리의 일상 생활에 깊이 자리잡고 있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공정무역이라는 단어와 함께 우리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은 카카오, 커피, 초콜렛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이는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자유’라는 가치를 방패 삼아 자라온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버린 탓일 것이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누리는 것이 기업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시간만큼이나 노동을 착취하는 것 또한 오랜 시간동안 자행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무역’이 올바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일상에서 스스로 추구해야할 가치로 자리잡기엔 너무 크고,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카카오, 커피, 초콜렛의영역으로 한정하여 공정무역을 이해하는 것은 공정무역을 ‘제대로’ 알지못하거나, 아직까지 깊이 공정무역의 가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공정무역’은 우리의 삶과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나타나는 노동 착취가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에서 생겨난 새로운 무역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노동 착취는 우리 나라의 기업과 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노동 착취에 오랜 시간 비난의 화살을 던져왔다.

이것이 단지 먼 나라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신과는 먼 이야기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곧 나만이 아니면, 어디에서는 노동 착취가 이루어져도 상관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공정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

더이상 공정무역은 알아야 할 상식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가치가 될 것이다.


공정무역은 기존의 ‘자연스러움’을 하나의 ‘논리’로 내세웠던기존의 무역 관행에서 암묵적이지만 대놓고 자행되어왔던 노동 착취에 반하여 떠오른 새로운 무역 형태이다.

하지만,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자본주의의 논리인 만큼, ‘대안’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이제서야 정상적으로 자리잡은 무역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무역에서 불공정한 대가를 받는 노동자들은 주로 제 3세계의 여성과 아동들이었다.

우리는 뉴스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 개발도상국의 여성들과 아동들이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조금의 임금을 받고 하루에 15시간 남짓한 시간을 일하는 현실을 보아왔다.

물론 남성들 또한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여성과 아동에게 집중된 노동 착취는 그들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일을 할 수 없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다. 빈곤하게 사는 그들에게 돈은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있어야 하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돈을 벌 기회가 적은 그들에게 제공되는 불공정한 임금은 ‘어쩔 수없는 선택’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충격적이었으며,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로 공정무역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 보호의 차원에서 공정무역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인권은 동등하다는 당연한 사실 아래에서 공정무역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 이는 자본주의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보편 논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주의’는 물론 처음에는 여성의 인권을 찾기 위한 운동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 속에서 ‘객관성’과‘보편성’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에 ‘주변인’으로 자리잡은 것들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확대되고있다.


즉, 기존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은 주로 서구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것들이고,

이에 따라 여성, 아동, 제 3세계등은 그 보편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를얻 기 힘든 사람들에게 어쨌든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합리화되어왔던 전통적인 무역에서의 노동 착취 또한, ‘그들만이 만들어낸’ 자본주의라는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며, 그 논리 자체가 인권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리고 바로잡게 하는 것이 ‘여성주의적 관점’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서 노동 착취 대상이 되는 여성의 현실과 보편성이라고 불리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여성주의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정무역은 ‘여성주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무역 자유화를 근간으로한 경제의 세계화는 개발도상국, 특히 가난한 여성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하루 1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살아가는 13억 인구의 70%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지구 경제의 심각한 성 불평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성이 빈곤에 훨씬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성차별적인 노동 시장뿐만 아니라, 소득 분배, 신용, 소득관리, 재산권과 같은 생산적인 투입에 대한 여성들의 접근이 남성에 비해 훨씬 제한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무역은 남성과 여성 간에 차이가 없는 성 중립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무역 자유화는 결국 국가 간의 불평등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쪽(세계지도 상의)’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들의 고용 기회가 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나, 노동 착취가 심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고 오히려 여성과 남성 간의 임금격차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에 공정무역은 여성들이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이용하여 빈곤 악순환의 사슬을 끊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세계 무역 구조에서 개발도상국이 얻는 이익을 단 1%만올려도 세계 1억 2800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옥스팜, Oxfarm)


공정무역의 거래량은 세계 무역의 0.1%에 불과하지만 유럽 시민의 80%가 공정무역을 알고 있으며, 2000년 이후 거래량은 매년 20% 이상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공정무역의 전체 매출액은 공식집계된 것만 1조 원을 넘어섰고, 바나나, 커피와 같은 일부 농산품은 주류 시장의 위협적인 경쟁자가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공정무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으며, 점차 일상 생활에서 공정무역 제품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공정무역은 ‘특정 제품’에 국한된다는 인식 또한 존재하고 있고, 이에 따라 마치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몇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제품이라 여기기도 한다.


마치 의식 있는, ‘착한 소비자’들이 쓰는 ‘착한제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최소 비용 최대 효과’라는 논리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논리로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논리는 동시에 작용한다. 즉, 값이 싸면서도 질이 좋은 제품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무역 제품이 어느 것에나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려울 수 있다. 그만큼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값이 올라갈 것 같고, 그 질에 있어서도 확신을 할 수 없게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정무역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곧 ‘착한’ 행위가 된다. 윤리적인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정무역 제품의 소비는 ‘윤리적인 소비자’들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윤리적인 소비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공정무역 제품을 택한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윤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소비를 하고 있으며, 사회 또한 그들에게 ‘착한 소비자’들이라고치켜 세운다.


하지만, 이러한 소비가 과연 윤리적인 가치로 표현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일한 대가에 마땅한 임금을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에 윤리적인 가치가 들어가게 되면서, 공정무역 제품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나쁜’ 행위를 하고 있다는인식을 심어준다. 이는 물론, 의식적으로 공정무역에 관심을갖도록 하는 지시판 역할을 하게 할 수 있다. 나의 소비가 이왕이면 ‘착했으면’하는 바람이 공정무역 제품을 선택하게 하고, 나아가 공정무역이 널리확대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정무역이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정당하게 임금을 받고, 일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노동의 당연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정무역 제품을 택하는 것이 ‘착하다’고 칭찬받을 것이 아니라, ‘당연한’것으로 자리잡을 때, 공정무역은 기업의 입장에서, 소비자의입장에서, 노동자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이 될 것이다.


공정무역은 전통적인 무역 형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대안이자, ‘나아가야 할’ 흐름이다.

일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고, 노동을 통해 개인적인 성취감과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이 사회 운동은 어쩌면,

새롭다기보다는, 우리가 ‘잃어버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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