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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Aug 09. 2018

재미있는 얘기

8월의 이야기 넷

“재미있는 얘기 좀 해봐요.”


항상 무심하게 지나쳤던 무의미한 건물의 지하 공간. 동네 분위기와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의 칵테일 바에서. 항상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던 그가 물었다.


‘재미있는, 얘기?’


그런 질문은 적어도 최근 5년 간 누군가에게 받아본 적이 단연코 없었다. 팍팍한 일상생활 속엔 ‘재미’란 게 들어앉을 자리도 없었다. 재미를 이야기로 엮어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할 상황을 맞닥뜨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뭐가 재미있었을까. 시간의 역순으로 과거를 훑어 나갔다. 며칠 전 봤던 시험에서 ‘족발’을 ‘갈비’로 적은 것? 아 아냐.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는 혹여 사적으로 재밌는 경험이었을지는 몰라도 ‘이야기’로 엮어서 누군가에게 전달할 만 한 사례는 아니지. 이야기로 소비될 만한 재미는 재미 자체로만 끝나는 재미가 아니라 재미 이면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재미가 아닐까? 그러니까 누군가의 공감을 부를 만한 재미라든가, 깔깔 웃다가 웃음을 그친 순간 밀물처럼 어떤 감동이 몰려올 수 있을 법한 재미라든가, 아니면 다사다난한 세상사를 한데 꿰어 내면의 창으로 관조한 통찰의 결과물로서의 재미라든가, 뭐 그런 것.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늦은 아침에 어그적 어그적 일어나, 눈 비비며 집 앞으로 나가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애써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온다. 화장실로 들어가 간단한 샤워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배달된 신문 한 부를 챙겨 빠른 걸음으로 집 앞 카페에 들어간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읽기 싫은 신문을 읽는다. 기계처럼 스터디 과제를 하고, AI처럼 글을 쓴다.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끄적인다.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온 ‘축하합니다’라든가 ‘아쉽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힐끗 보고 무감각하게 넘겨버린다. 다시금 쌓인 시사상식을 외우고, 글을 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간다. 그런 기계적인 일상의 나열 속에 재미란 게, 이야기로 엮을 만 한 재미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시시콜콜하고 지리멸렬하고 의미 없는 몇 구절의 공허한 말들을 그에게 건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칵테일 빨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그는 그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도 재밌는 얘기를 좀 해 봐요.”


“재밌는 얘기요? 뭐가 있을까... 듣고 싶은 재밌는 얘기의 카테고리를 정해 보세요.” 

그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선택지를 제시했다.


“카테고리라...뭐든 상관없어요. 가장 재밌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선택지를 역으로 제안하다니.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며 말했다.


“음...뭐가 제일 재미있을까요...?”


그는 다시금 ‘재미있는 얘기’에 대한 무책임함을 보였다. 나는 재미있는 얘기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게 만든 그에 대한 일말의 저항감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요구할 때 답변으로 기대하는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재미있는 얘기가 뭐라고 이렇게 사뭇 진지한 말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그건 이 상황에선 크게 중요치 않았다. 이야기 할 대상으로서의 ‘재미’의 실례를 꼭 들어야만 했다.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인 나 자신에 대한 환멸 때문일까. 그가 말하는 재미있는 얘기가 사실은 별 재미없는 시시콜콜한 말이어서 내가 한 공허한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단 걸 확인하고 안심하고자 함일까.


“내일은 제가 좋아하는 교수님을 만나기로 했어요. 가끔씩 교수님들께 먼저 만나자고 해요.”

그는 갑자기 화제를 돌린다.


“교수님이랑 만나면 무슨 재미죠? 심지어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노력도 아까워서 친구가 없다고 하셨으면서.”

사실 이 무심한 공간이 앨리스가 도착한 이상한 나라가 아닐까란 의심을 하며 다시 물었다.


“교수님들께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면 자기가 겪은 과거의 얘기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요. 학생운동을 했던 얘기, 공부할 때의 얘기. 그런 것들 말예요. 그건 사실 재밌지도 않고 디테일하게 기억나지도 않아요. 그저 그들이 생각하는 재밌는 얘기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동그란 눈동자를, 더 동그란 동공을 잠자코 바라봤다. 그리고 나선 더 철저히 의미 없고 공허한, 가끔은 무례한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그가 계산하기로 했던 술  값을 내가 계산하고, 일부러 그의 집 앞까지 그를 바래다 줬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다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나와, 나보다 더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재미없는 사람들이 나눈 기괴한 대화가 재미있었다고 생각했다.


우린 다시금 사무적인 관계를 이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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