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이야기 열넷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능력이 중요하다고 배워 왔다. 진리와 자유의 전당 대학교에서. 사회과학이 합리적 인간관을 기초로 사회를 과학적으로 들여다보기에, 그것들을 배운 나도 어느덧 전제나 가정을 뿌리에 두고 논리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결론에 도달하는, 학문 속의 인간을 내재화 했다.
하지만 사회는 이성과 논리, 합리성의 잣대로만 바라볼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 관계의 복잡한 총합으로서의 사회는 이성 말고 다른 것들을 추가적으로 요구한다. 감정이나 공감능력 같은 것. 논리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것. 남을 끌어들이는 매력이라든가, 남을 설득하는 과장된 표현력이라든가. 고구마 상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든가. 부당한 일을 겪고도 아무 일도 아닌 양 넘기는 일도 그렇고. 내가 아닌 나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나인 척 하는 것도. 그런 것들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이 세상에서 별 탈 없이 살아남게 만드는 힘.
이성과 비이성 중 하나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둘 다 가져가면서 적절히 상황에 따라 섞어 쓰는 일이 버겁다. ‘이 상황에선 당연히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성이 요구되겠지’라고 판단하고 이성적인 대응을 했다가 인간성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선 비이성적인, 감정적인 대응을 해볼까?’라고 다시 행동을 수정하면, 판단능력 없는 놈이 된다. 둘 다 싫다. 그냥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자기가 유리할 때에 그에 맞는 유리한 대응을 선택할 수 있는 권력자들은 더 싫다. “흠...오늘은 내가 기분이 감성적이니까 쟤가 감성적으로 대응해줬음 좋겠어”라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핵 싫다. 평소엔 합리적 대응을 요구했으면서 자기가 꼴리는 대로 행동해 평소의 요구에 평소대로 대응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힐난하는 사람이 너무 싫어 미치겠다는 소리다. 그런 권력자가 가진 권력엔 나이, 성별, 계급 같은 것들이 있다.
오늘 이렇게 분노에 가득 찬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 그런 문제를 몇 번이고 겪어서다. 입사 면접엔 내가 열심히 공부해 쌓아 온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구조를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이 하등 도움이 안 된다. 그 노력 과정은 말로써 하는 전달 방식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개무시 된다. 그러니까 ‘역량중심채용’을 하는 기업체들은 말 할 때 눈동자가 떨리는지 안 떨리는지를 역량의 한 가지로 유형화 해 놓고, 눈동자가 떨리면 ‘넌 거짓말을 즐겨 하는 애 → 음...원활한 조직생활을 할 수 없겠군 → 탈락’ 한다는 거다. 내용은 들을 새도 없다. 그런 식의 예는 너무 많아서 셀 수조차 없다. ‘넌 말할 때 어조가 너무 균일해 → 감정이 없는 애 → 열정이 떨어지는 애 → 업무 달성도가 떨어지겠군 → 탈락’도 된다는 거다. 그럼 감정을 표현하는 표현력이나 남들을 긴장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친밀도 같은 것도 학교에서 가르치시든가.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없다. 합리성의 세계에서 쌓아 온 내 노력 과정은 그렇게 평가절하 당한다.
그렇게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다가 엄마랑 전화 통화를 했다. 엄마는 가족이니까. 가족이니까 내 감정을 털어놓고 위안 받을 수 있겠지...그러니까 엄마는 감정의 영역이겠지...라고 안심해선 안 된다. 안심했다가 된통 당한 적이 많아서 경계해 온지가 어느덧 살아온 날 만큼이 되었지만, 가끔씩 경계심을 풀다가 낭패를 당한다. 오늘도 그랬다. 내 일상을 미주알 고주알 별로 얘기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괜히 혹시나 하는 맘에 얘기를 풀어놓았다가, 어느덧 엄마는 이성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나 하나 뜯어 비판하기 시작했다. “넌 그렇게 살면 안 돼. 사회 생활에선 이러이러한 측면들을 조심해야 한다구. 그러니까 너의 장점은 장점대로 살리되, 단점은 꼭 고쳐야 한다는 거야”라는 식의 얘기였는데, 어느 것이고 내가 원했던 답변은 아니었다.
내 이성 영역이 풀가동했다. “아니 엄마 내가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엄마는 내 얘길 안 듣고 엄마 얘기만 하잖아요. 내가 내 단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니잖아요”라는 식으로 이성엔 이성으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대응을 했다. 엄마는 그 즉시 감성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그게 너를 아끼고 사랑하고 염려하는 부모한테 할 소리야?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까지 나오면 정말로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는 소리다. 난 무력하게 무장해제 된다. 어떤 말도 부모권력엔 대항할 수 없다. 그러면 탈룰라니까.
엄마는 조금 더 나아간다. “너의 그런 태도가 정말 염려돼. 지금은 그래도 낫지. 결혼하면 어쩔 거야. 부인이라고 데려와서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그럴 거니? 엄마는 그 꼴 못 봐.” 내가 결혼을 단념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엄마 당신이고, 내가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도 감정과 이성을 왔다갔다 아무 때나 기준 없이 사용하는 엄마 때문이고, 그런 말들이 앞니 근처까지 쏟아져 나왔지만 다시 힘과 열정을 다 해 삼켜낸 것에 대해 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현재에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니, 사실 모든 것을 다 엄마나 양육환경 탓으로 돌리는 건 심리학적으로든 뭐로든 타당하지 않다. 엄마도, 나도, 어떤 성인이든 그 성인 말고 다른 성인(그러니까 하나님이나 공자 같은)이 아니라면 인격이나 인간성의 흠결을 갖게 마련이니까.
휴...여기까지 혹여 읽었다면 알 수 있으시겠지만, 나의 감정은 이렇게 익명의 활자로서만 제대로 배출이 된다. 언변이 화려하지도 않고 얼굴에 철판을 까는 성격도 아닌지라 말로서는 내 감정을 잘 배출하지 못한다. 모든 감정을 삼키고 억누른다. 그래서 왜곡된 인격을 갖게 됐나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글로써만 이렇게 직설적으로도 풀어낼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결국에 하고 싶은 말은, 이성이든 감성이든 합리든 비합리든 하나의 기준으로만 좀 가면 안 되겠냐는거다. 둘 다 가져가야만 하는 사회는 정말 너무도 버겁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선진국은 다를까. 자유주의와 합리성이 제도적으로 구현된 북유럽 사회는 조금 다를까. 사람들이 “헬조선! 빼액!” 하면서 자유와 합리를 찾아 떠나는 것도 다 같은 이치일까.
나에겐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이 가진 용기조차 없다. 그러니 이성과 비이성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또 한 번, 갈고 닦아야겠지. 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