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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래 Apr 15. 2024

상량문을 아시나요?

누가 살아도 낮은 윤택하고 밤은 평온한 집이 되게 하소서!

산마을로 살러 오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이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물건이 집이다.


집 만드는 거 보통일이 아니다. 돈도 필요하지만 정성도 쏟아야 한다. 모양을 어떻게 해야 폼 날지, 어느 쪽으로 창을 달아야 좋은 전망을 볼 수 있을까도 고민한다. 어떤 자재가 좋은 지도 알아봐야 하고 누구한테 맡겨야 바가지 안 쓰고 싸게 잘 지을까도 머리를 굴린다.


돈은 최대한 들이지 않아야 한다. 멋있고 튼튼하게 잘 지어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집 짓기를 계획하는 누구나 멋있게 지으려 노력한다. 집의 모양에 신경 쓰고 좋은 자재를 고른다. 돈을 들이고 정성을 쏟는다.


아무리 그래도 예전 같지는 않다. 참 쉬워졌다. 주문하면 자장면 배달하듯, 트럭에 실어 “집 시키신 분!” 하며 배달해 주는 집도 있다.


예전에 집 지을 때는 기도하듯 지었다. 집 짓기가 평생의 업적인 사람도 있었고, 가족들이 기리는 날이기도 했다. 천지신명께 고하며 시작했다. 상량을 할 때는 집 짓는 의미를 담은 상량문을 써 올리고 들보 위에 소중히 간직했다.


내 집을 지으며 현장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의 고마움을 표했고, 같이 살 이웃들에게는 시끄럽고 번잡하게 해 죄송하다는 마음도 전했다.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도 만들어 선조의 뜻을 기리는 이도 있었다.


요즘도 기도방이나 명상실, 차방 등을 따로 지어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흔하지는 않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짓기 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상량식도 요즘엔 볼 수 없다. 상량이 필요 없는 공법의 집 짓기를 하는 이유도 있지만, 상량이 필요한 구조의 집 짓기에서도 생략한다.

     

크레인 부르고 기술자 몇 명이 붙어 하루 이틀이면 기둥 세우고 대들보 올리고 지붕까지 덮어버린다. 시간이 돈이다. 상량식 한다며 하루 버리면 주인도 현장 기술자들도 손해다. 빨리 집 짓기를 끝내야 수지가 맞다. 빠듯한 공사 일정에 상량식은 시간 버리고 쓸데없이 비용 낭비하는 비효율적이고 거추장스러운 행위가 됐다.

    



집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은 다음 그 위에 마룻대를 올리는 것을 상량이라 한다. 마룻대는 건물의 중심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자재를 사용하고 정성을 들인다.


이때 집 짓는 의미와 기원을 담아 상량문을 쓰고, 술과 떡, 돼지머리, 북어, 명주실, 한지 등을 마련해 새로 짓는 건물에 재난이 없도록 제를 올린다. 상량식이다. 이웃과 친척, 지인 등을 불러 음식을 나누었다.


건축주는 마룻대에 백지로 북어와 떡, 돈 등을 싸 묶어 놓기도 하고, 제상에 직접 돈을 놓기도 한다. 잔치가 끝난 후에는 일하는 목수들이 가져가 회식을 했다.


상량문은 상량식 날 짓는 축문이다. 원래는 집 지은 내력이나 생각 등을 비단이나 종이에 써 나무에 홈을 파고 넣어 보관했다. 그러다 집 지은 날짜와 짧은 기원문을 종도리에 직접 쓰는 식으로 간략해졌다. 일반적으로 위쪽에는 ‘용(龍)'자, 아래는 '귀(龜)'자를 쓰고 가운데 상량 날짜 정도 쓴다. 좋은 문구를 같이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니 상량문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한 참 됐다. 홍천에서 아는 이가 집을 지으며 상량문을 써 달라 부탁해 쓴 적이 있다. 길게 축문을 쓰는 게 아니라 붓으로 몇 자 써 올리는 약식 상량문이었다.


마룻대에 예전 형식이 아닌 한글로 늘 푸른 날처럼, 늘 푸른 마음으로 좋은 집 짓고 잘 살라는 뜻을 담아 ‘푸르른 날 푸른 마음’이라 썼다. 4년 전쯤 일이다.



그 후 집 짓는 이들은 많이 봤는데 상량식은 물론 상량문을 쓰는 것도 못 봤다.


아파트에 사는 요즘 사람들은 자기 집 지을 일이 없어 상량식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다. 내 집 마련은 다들 하고 산다. 그럴 때 마련 의미를 담아 상량문 한번 써 보면 어떨지?


산마을에 조그만 카페를 짓고 마음을 담아 상량문을 지었다. 나무판에 써 벽에 걸어두고 이따금 쳐다본다.




상량문


살다가 멈칫 꽃이 피고

길을 가다 선 듯 바람 부는 것이

언제 내 뜻이었던가


내 맘 아득히 비 올 때면

옆에 있는 사람도 도진 듯 그립고

늦가을 부리 무뎌진 볕에 꽃잎 지면

떠나고 보낸 사람들 하나하나 단풍 되어

가슴에 새겨지는 아픔이 언제 내 뜻이었는가


속절없는 인연에 외롭고

쉴 새 없는 가난이 등짐이던 밤 매듭마다

잠들다 깨 밤을 새우고 다시 맞는 우울한 아침도

누군가는 나를 위해 밥 짓고 옷 깁고

따뜻이 덥혀놓은 아랫목의 목메던 사랑


나를 위한 누군가의 지극한 가슴앓이에

진정 감사한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사는 것

살다가 무엇이 되는 것도 내 뜻은 아니었지만

때로 어긋나는 인생에 분노하고 시기하고

때때로의 거짓이 부끄러워

오십 넘어 누군가에게 감사할 집을 짓는다


꽃 피고 바람 불면 그대로

그리운 대로 사랑하는 대로 뜻대로 터를 닦고

뼈를 발라 기둥을 세우고 바람을 막고

그대 배 터지게 밥 짓고 따뜻하게 등 누이고도 남을

충분한 볕이 드는 집


배 아프게 낳고 마음 졸여 기른 아이들이

오물오물 아이를 낳아 꼼지락거리며

텃밭에서 빨간 토마토를 한 아름 따 가슴에 안고

하늘 넓은 다락방에서 잠이 들고


소문도 없이 첫눈 내리는 날

너무 오래 잊었던 벗이 젖은 편지로 돌아와

아궁이 가득 장작을 지피고

고기를 굽다 소주를 마시다 노래를 부르다

별 것도 아닌 인생 아쉽다 조롱하다

뒷산 억새처럼 늙어 갈 집


볕 잘 드는 마당가에

매화나무 하나 심어 기르다

비늘마저 하얗게 늙어지면

나무 아래 살 묻어 겨울을 나고

이듬해 이른 봄비에 깨어

키 작은 제비꽃이 되는 집


집을 짓는다

믿음 없이 산 삶의 부끄러움과

때때로의 잘못들을 마음에 새겨

오늘 집을 상량하며

머리 숙이고 손을 모아 기도한다


누가 살아도 해 뜨면 따뜻하고

낮은 윤택하고 밤은 평온하며

어느 계절도 거스르지 않는

저기 바람 흘러가는

숲이나 강 들꽃이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자연 그대로의 집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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