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양반사회였다. 양반들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던 경제적 버팀목은 노비였다. 전 인구 10% 이상이 노비였고, 학자들에 따라서는 인구 40%가 노비였을 때도 있었다 한다.
노비들은 사유재산이었고 소모품이었다. 마음대로 사고팔고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줬다. 맘 내키는 대로 멍석말이를 하고 매질도 했다. 법은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했지만 주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죽였다. 문제가 생기면 강상 법도를 따졌다.
노비 위 계급이 상민이다. 농사짓고 물건 만들고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금을 내고 군역도 지었다. 양반 벼슬아치들은 그들 세금을 거두어 큰 집에서 첩 거느리며 호화롭게 살면서도 군역조차 면제였다.
미국 독립운동과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구미 열강들이 산업화에 매진할 때 조선 양반 사대부들은 여전히 사색당파를 나누어 자기들 잇속 채우기에 바빴다. 그 틈바구니에서 죽어 나는 것은 상민과 노비가 대부분이었던 백성들이었다.
당시 백성의 처절한 삶 단편을 보여주는 ‘애절양(哀絶陽)’이란 시가 있다. 직역하면 ‘양을 자른 것을 슬퍼함’인데, 남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자른 것을 보고 슬퍼서 읊은 다산 정약용의 시다.
갈밭마을에 사는 젊은 아낙이 관문 앞에서 통곡을 한다. 통곡의 사연은 이렇다.
시아비는 죽어서 삼년상을 마친 지가 오래됐고, 아들은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관가에서는 남편과 죽은 시아버지 막 태어난 아이까지 세 사람 몫 세금을 내라 한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벼슬아치들은 들은 척도 안 하며 외양간에 묶어놓은 소까지 끌고 가 버렸다. 그러자 남편이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자식 낳은 죄’라며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다.
젊은 아낙이 통곡할만하다.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은 이런 풍경을 보고 슬프고 애절한 시, 애절양을 썼다.
영화 '자산어보'에 이를 모티브로 한 장면이 나온다. 자산어보는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이야기다. 약용이 보고 쓴 풍경을 형인 약전을 다룬 영화에 담았다. 이래서 영화나 드라마 보고 역사공부 하면 안 된다는 거다. 감동시켜 돈이 된다면 역사에 무슨 짓도 한다.
암튼, 무지렁이 백성들은 ‘절양(絶陽)’까지 하며 처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임금을 비롯한 양반 지배층들, '부자들은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이었다. 애절양의 마지막 내용이 그렇다.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세리를 피해 민초들은 풀이라도 뜯어먹고 살겠다며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삶이었다.
제주 추사관 야외 전시물 부분
당시를 살았던 양반관료 중에 다산만큼 어쩌면 그 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있다. 세도가 집안 출신으로 형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의 높은 관직에 있었던 권세가지만 서예가로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다.
추사는 다산의 아들 친구였다. 당시 수선화가 귀해 많은 선비들이 그 꽃을 갖고 싶어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속에 빠져 죽고 그 자리에 핀 꽃이 수선화’라 소개한다.
추사가 살던 당시에는 중국 연경에서 수선화를 구할 수 있었다. 연경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부탁해 한 뿌리라도 얻으려 노력했다. 추사가마흔세 살 때 평안감사로 있던 아버지를 뵈러 갔다. 마침 연경을 다녀오던 사신이 평안감사인 아버지에게 수선화를 선물했다. 그것을 얻어 남양주에 살던 다산 정약용에게 선물했다 한다. 친구 아버지에게 귀한 꽃선물을 한 것이다.
김정희는 추사체와 세한도로 유명하다. 제주 유배지에서 완성하고 그렸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봐도 잘 쓴 글씨인지, 잘 그린 그림인지를 모르겠는데, 잘 쓰고 잘 그렸다 한다. 조선 후기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받는다.
세도가 집안에 실력 있고 재주도 좋다 보니 주변에서 ‘우쭈쭈’ 해 준 분위기가 큰 것도 같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성품이 기고만장했다. 남들이 쓴 글씨나 그림은 인정하지 않고, 문자향(문자의 향기)이 없다는 둥, 서권기(책의 기운)가 없다는 둥 깎아내렸다. 한마디로 무식한 놈의 글씨고, 못 배운 놈의 그림이란 얘기다.
제주 추사관 야외 전시물 부분
봄날의 제주도는 수선화 천지다. 들판 가득 수선화 질펀하게 핀 날 제주에서 유배 중인 추사를 만났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가면 추사가 유배와 살았던 집이 있다. 이곳을 제주시에서 추사관으로 꾸며 놓았다. 살던 초가 4동은 옛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고 글씨와 그림 등 복제품을 전시해 놓았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다.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추사는 수선화를 무척 좋아하고 아꼈다. 수선화와 관련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는데 제주 추사관 마당에는 그 내용 중 하나를 새겨 전시하고 있다.
추사의 평생 절친이었던 이재 권돈인이란 이가 있다. 명문가에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이다.
수선화가 핀 모습을 보고 추사는 이재에게 ‘섬 곳곳에 수선화가 피어 있어 섬사람들이 소와 말먹이로 쓰는 것이 애석하다’는 편지를 썼다. 전시물 내용이다.
전시물에는 없지만 실제 편지에는 "보리밭을 해친다며 파내 버리는 섬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는 내용도 담았다.
백성들은 자신의 성기까지 잘라가며 억울한 세금을 피해 도망다니던 한탄의 시대다. 세도가이며 부자양반인 추사는 수선화를 보며 무식한 섬사람들이 말먹이 소먹이로 쓰는 것을 애석해하고 있다. 보리농사를 잘 지으려 그 아름다운 꽃을 파내는 모습에 속을 태운다.
소먹이 말먹이로 쓰고 보리농사를 위해 힘들게 뽑아내야 하는 굶주린백성들의 수선화와, 예쁜 꽃이 없어지는 걸 보며 안타까워하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추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