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지켜준다는 것..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무인카페 안에는 규진 씨랑 나밖에 없었다.
정성스럽게(?) 끓인 한강라면을 앞에 가져다 내려놓으니 어이없다는 듯 재밌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먹고.. 커피도 마셔도 돼요"
우리 집 앞에는 무인카페가 있는데 아이스크림 과자 한강라면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저.. 술 마시면 습관처럼 여기 와서 라면 한 그릇 먹고 들어가다 보니..
오늘은 이상하게 혼자 먹기 싫어서 붙잡은 거 같다.
그리고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먹을 거라고는 하나 없는 집에 데려가기도 그렇고.. 일단 여기 사람들은 내가 결혼한 줄 아니까.. 집에 데리고 갔다가는 거짓말인 게 탄로 날 테니까..
"아쉽네..."
".. 네?.."
규진 씨 라면을 먼저 내려두고 내 라면도 내려두고 앉으려니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난 집에 들어오라는 말인 줄 알고 두근거렸는데"
"아.."
이건.. 장난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진심일까..
"제가.. 결혼을 해서.."
왜.. 이 사람한테 거짓말을 하는데 이렇게 마음이 찔리는 걸까..?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그런데 아까 오빠들한테는 뭐라 하고 나온 거예요?"
"애들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간다고 했어요"
"아!.. 그럼 일찍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핑계였으니까"
"아.."
처음 본 이후로 바로 이렇게 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라면 실망할 거 같아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아님 유부남한테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을 가진 더럽고 추악한 욕망인지 나조차 구분이 안 가기에.. 그런 궁금함은 일단 마음에 담아두기로 했다.
이 정도까지는.. 그저 심심해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조금 오버스럽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넘으면 안 되는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까..
"내일.. 밤바리가요 같이.."
라면을 다 먹고 나오는데 내일 보자는 약속을 하는 사람
내일.. 딱히 약속이 없기는 하지만..
"음..."
"약속 있으면 거절해도 돼요"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어차피...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 잠깐 반짝하지 오래가지는 않았어..
그저 바이크라는 매개체 때문에 생기는 도파민이 간혹 사람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지난번 바리가 한편 즐거웠으니까 나나 저 사람이나 그 기운 때문에 착각하는 것일 수도..
그런 거 있잖아..? 오피스 와이프처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닌데 일할 때 와이프만큼 죽이 잘 맞고 좋은 그런 관계.. 우리도 그런 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
언제나 장난기 가득한 미소 짓는 표정..
나보다 오빠인데도 저 표정을 볼 때면 마음이 너무 편해진다.
어제의 평온했던 기분과 달리 오늘은 출근이 덜컥 겁이 났다.
어제 그 일도 있었고.. 이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걱정이 되면서도 출근하기가 싫어졌다.
어릴 때부터 이 쪽 업계에서 일을 하고 싶었고.. 뒤늦게 이룬 꿈이지만.. 정작 이곳을 접하였을 때 남녀차별과 흔하디 흔한 성희롱이 점점 미련을 없애버리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조금 투박하고 차가운 느낌의 인사..
내 인사에 다들 뻘쭘하게 인사를 받아주고 있었다.
지체할 필요 없이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근무 10분 전에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기를..
오전 내내 무슨 말이라도 들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정리가 되었다.
중간중간 마주치기는 했지만 둘 다 먼저 그 자리를 회피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다행이라는 마음이 무색하게 퇴근 후 차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운전석 문을 잡더니 이 과장이 나타났다.
"아뇨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아.. 그럼 이 상태로 계속 지내자는 겁니까? 사람이 도대체"
"저기요.. 이대로 지내세요 그냥 아는 척하지 마시고 친한 척하지 마시고요"
"와 말하는 거 보소 진짜"
내 말이 심기가 걸렸는지 어제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려고 하였다.
나도 모르게 운전석을 사이에 두고 문에 끼이듯 불안하게 뒷걸음질 쳐야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웃겼는지 비웃음과 함께 다시 더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내가 조금 과격했는데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지 안 그래 서희씨?
너무나도 가증스럽운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가만히 그 사람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렇게 사람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말고.. 내가 좀 너무 적극적으로 다가간 거 같은데 그래도 우리 오래되었잖아? 이런 일로 이렇게 지내는 건 아니지~ 그리고 남자가 이렇게 대시했으면 적당히 넘어오는 맛도 있어야지?"
"오래되었단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저 남자친구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시지요 지금도 충분히 무례하신 거 같은데요"
"하- 미치겠네.. 너 남자친구 없는 거 알고 있는데 또 거짓말이야?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주는 거 잘 받아 처먹었잖아?"
"뭘 주셨다는 거죠?"
"지금까지 내가 사다 바친 커피가 얼마야? 그것도 다 좋아서 받아먹은 거 아니야?"
".. 하.. 그거 법카로 직원들 다 같이 먹은 거잖아요? 왜 이 과장님이 사주셨다는 듯 이야기하세요?"
"아씨!!"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또 손을 들어 올렸다
그 행동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후우.. 이럴 거면서 왜 까불어? 일단.. 내 차로 와"
짜증 난다.. 왜 이따위에 약해져야 하는지.. 그리고 이 놈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한테 이러는 거지?
움찔한 내 모습에 자기가 이겼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더니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그 바람에 힘없이 나도 휘청거렸다.
"놔!! 내 몸 만지지 마라고!"
내 팔이 낚아채길래 나도 거칠게 뿌리쳤다.
"적당히 해.. 나 인내심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어느새 운전석 앞까지 파고들어 내 두 팔이 잡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미친놈 같은 놈은 처음이라 순간 나도 오금이 저려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진작 말 잘 들었어야지"
그 사람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고 나도 운전석 문을 돌아 밖으로 살짝 걸어 나가며 문을 살짝 닫으며 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자기 맘대로 되었다 생각했는지 뒤돌아 자신의 차로 향하는 것을 보고 다시 문을 벌컥 열어 차에 올라탔다
소란스러운 움직으로 인해 생긴 소리에 재빨리 뒤돌아 나를 따라와 문고리를 잡는 거 같았지만 난 재빨리 문을 잠그고 시동을 걸었다.
항상 여유롭게 시동을 걸어 예열을 하고는 했지만 이번에는 시동을 걸자마자 거칠게 차를 몰아 회사를 나왔다.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런 상황도 처음이고 그래서 더 두려운 거 같았다.
직장이나 집은 언제나 안전한 곳이었는데 스트레스는 받을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때 차 한 대가 거칠게 내 뒤를 쫓는 게 느껴졌고 역시나 뒤에서는 이 과장의 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집을 가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렇다고 경찰서를 가도 되는 걸까..?
경찰서를 간다면.. 내일 무슨 일이 생기는 거지?
어떻게...
지이이이이잉-
그때 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센터디스플레이에 고규진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그 이름에 나도 모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출발했어요?"
맞다.. 오늘 퇴근하고 바로 보기로 했는데.. 이 과장 때문에 늦었구나.. 출발할 때 연락 준다고 했었는데
"아.. 그... 그게..."
순간 전화를 받고 잘못됨을 감지했다.
왜 이 전화를 받았을까.. 이 사람 전화받아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불편하기만 할 텐데..
"바빠요?"
"아니요.. 그게..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에요?"
나도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긴장이 풀려 가는 듯했다.
그때 뒤에서 크락션 소리에 다시 정신이 차려지면서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어디예요?"
운전에 집중한다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바로 어디인지 물어왔다.
"모르겠어요.. 지금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카톡 확인할 수 있죠?"
"아.. 네.."
"그럼 문자 하나 보낼 테니까 동의만 눌러요 카카오지도 사용하죠?"
"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톡이 날아왔다 카카오지도 위치공유 알림이었다.
다행히 차선이탈방지모드가 있어서 잠깐의 딴짓에도 차가 크게 요동치지는 않았다.
"거기서 쭉 직진만 해요 내가 갈 테니까 전화는 끊지 마요"
"네.."
온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는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이 사람이 온다고 해서 해결이 될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고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까..?
이 과장이 규진 씨한테 이상한 이야기 하는 건 아닐까?
"이상한 사람이 따라와요?"
이 사람이라면.. 내 비밀을 지켜줄 수 있을까..?
아니야.. 직업 알려지기 싫은 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내가 국정원도 아니고.. 그저 피곤해지기 싫어서 숨겼던 거뿐이지.. 그리고 이 사달이 났는데 여기를 더 이상 다닐 자신도 없었어..
"사실.. 회사.. 사람이 따라오고 있어요.. 전부터 자꾸 보자고 그랬는데.. 거절했거든요.. 근데 어제.."
어제.. 어제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내가 말을 머뭇 거리자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직도 따라와요?"
"아... 네..."
뒤에서 계속 상향등을 켜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 여름이라 해가 떠 있어서 크게 의식이 가지는 않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보일 거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무 위험하게 운전하지 말고 조심해요"
"하아.. 네..."
뜬금없이 우리 첫 바리 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있었던 오빠들 신호에서 시동 꺼먹은 이야기나 길 잘못 들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어졌다.
"보여요"
"네?"
"검은색 G80 맞아요? 뒤에는 흰색 HG"
"아.. 네! 맞아요!"
나를 봤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흘러나왔다.
이내 백미러에 규진 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과장 차 옆에 붙어서 한참을 아이컨텍하는 듯 보였다.
다른 제스처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내 내차와 이 과장 사이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천천히 속도가 줄어드는 듯 보였다.
"앞에 주차할 곳 있으면 주차해요"
"그래도.. 돼요?"
"네.. 걱정 말고 주차해요 내가 지켜줄게요"
왜 저 말이 이렇게 믿음이 가지..?
이제.. 겨우 두 번 밖에 안 봤는데..
조금만 더 가니까 갓길이 보여서 천천히 차를 세웠다.
그러자 바로 뒤에 규진 씨가 주차를 하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 과장도 그 뒤에 주차를 했다 그러고 내리려더니 규진 씨가 나에게 다가오는 걸 반쯤 걸쳐서 우리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난 창문만 살짝 내렸다.
"괜찮아요?"
"아.. 네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뒤를 바라보았다.
"차에서 잠깐만 기다려요"
"아.. 저.. 저기.."
뒤돌아 가려는 규진 씨를 불렀지만 살짝 보더니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 이 과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니 바로 차에 타더니 가만히 있는 이 과장
창문을 두드려 내리라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는 듯 보였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규진 씨가 내 차 방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이 과장은 바로 거칠게 차를 빼더니 나를 추월해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순간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서희씨.."
나도 모르게 무서웠는지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그런 내 행동에 당황스러웠는지 주춤하더니 이내 따뜻한 손길이 머리를 스쳐 따스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아니.. 이게..."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에 나도 당황스러워서 열심히 훔치니 이내 앞에서 따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