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졸업 직후 석사 시절 연구했던 제조 AI 분야 스타트업으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규모가 20명이 안 될 때 입사해 50명이 넘을 때까지 2년 1개월 근무 후 퇴사했다. 이번 글에선 간단한 회사 생활 회고와 그간 기치관의 변화를 다루려 한다.
2021년: 순조롭고 단조로운
학부 전공인 식품 공학이 아닌 IT 계열 일을 하고 싶어 데이터사이언스융합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여러 연구 주제를 거쳐 제조 설비에서 발생한 시계열 형태의 센서 데이터 분석을 연구 주제로 잡았다. 주로 센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비의 이상 상황을 감지할 수 있는 이상 탐지 연구를 했고, 데이터 양이 많다 보니 AI 방법론을 자주 사용했다. 졸업 즈음 자연스레 해당 분야의 회사에 지원했고 연구 이력과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이 잘 맞아 어렵지 않게 입사했다.
포토레지스트(PR) 스트립 시장 세계 점유율 1위인 국내 반도체 장비 회사와의 국책 과제에 투입됐다. 원자층 식각* 공정 장비에 탑재할 수 있는 공정 결과 예측 모델 개발이 주 내용이었다. 프로젝트 매니저(Project Manager, PM) 1명과 나 포함 데이터 사이언티스트(Data Scientist, DS) 3명이 참여했고, 내가 투입될 당시 이미 과제는 킥오프 후 1년 정도가 지난 상태였다. 국내 종합 반도체 제조사(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IDM)에 재직했던 PM을 제외하면 반도체 지식을 깊게 갖춘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도메인 지식을 걷어내고 생각해 보면 반도체 특유의 반복 공정에서 얻은 시계열 데이터가 있었고, 석사 시절 개발했던 모델을 활용해 풀 수 있는 문제 같았다.
*식각: 반도체 원재료인 웨이퍼 표면에 원하는 feature를 새기는 행위
초기 스타트업임에도 최소 근무 시간이 적은 편이었는데, 처음 맡은 프로젝트에 재미를 느껴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법한 딥러닝(Deep Learning, DL) 모델을 개발했다. 실험 결과를 프로젝트 팀원들에게 공유했을 때 반응은 긍정적이었고, 기존에 사용하던 머신러닝(MachineLearning, ML) 모델보다 성능이 뛰어났다. 물론 여러 개선 사항에 대한 피드백도 내외부적으로 받아 지속적으로 모델을 고도화했다.
일은 재밌었고, 동료들은 친절했다. 워라밸은 지켜졌고, 엘리베이터 대기 시간을 제외하면 회사와 1분 거리인 자취 생활과의 시너지는 엄청났다. 반도체라는 esoteric 한 분야에서 도메인 지식을 쌓아갈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것 없었다. 제조 AI 분야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회사를 상장시키는 데 일조하고도 싶었다.
2022년: 의외로 사람은 변한다, 우연히
회사가 Series A 투자로 80억 원을 유치한 해였다. 연봉 인상도 많이 돼 웬만한 또래 직장인들보다 급여가 높았다. 소비 습관의 변화는 딱히 없었다. 근무 중에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순조로운 IR 결과 때문이었는지, 나를 포함한 회사 동료들이 대체적으로 안일했었다. 오히려 일이 익숙해져 변화를 갈구했는데, 뜬금없이 회사 외적으로 춤이라는 취미가 생겼다. 지금까지도 즐기고 있는 취지지만 회사 외적으로 회사 내적인 공허함을 채울 순 없었다. 반도체 설비를 대상으로 반복적인 일을 하던 나는 또 뜬금없이 '사람'의 예술인 연극에 빠졌다. 여름이었다.
그 와중에 데이터 마이팅 분야 세계 최고 학회인 KDD에 투고한 석사 졸업 논문이 게재 승인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졸업생 신분이라 지원금 없이 사비로 논문 발표를 하러 학회에 참석해야만 했던 상황이 달갑진 않았다. 결국 교수님의 부추김에 회사 연차를 소진해 미국 워싱턴으로 향했다. 여행은 나에게 '친한 친구들과 떠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곳을 방문해 보는 것' 정도의 의미를 지녔었다. 해외도 많이 가 봤던 터라 환상도 없었다. 워싱턴 방문의 목적이 여행은 아니었지만, (이미 졸업한) 대학원생의 perks 중 하나는 학회 방문을 핑계 삼은 여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타의에 의한 '여행'이었기에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연극영화과 입시(잘못 읽으신 게 아니다) 관련 도서를 들고 비행기에 올라 타 도착한 워싱턴은 17년 만의 방문이었다. 학회 첫날 관심 분야인 그래프 신경망(Graph Neural Network, GNN) 세션에 참석해 강의를 들었다. 옆에 앉은 참석자가 내가 들고 있던 학회 리플릿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물어 답해 주고, 나는 세션 중간에 흥미를 잃어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모르는 사람에게 인스타그램 DM을 받았다. 학회 리플릿을 구하던 GNN 세션 참석자 알렉스였다. 내 이름표를 보고 모종의 이유로 인스타에 검색해 봤다고 한다. 당시(지금도) 내 인스타에는 춤 영상이 가득했다. 알렉스는 자기도 춤을 춘다며 같이 릴스를 찍자고 제안했다. 알렉스는 뉴욕 소재 대학교 학생이었고, 경험 삼아 KDD 논문 발표자인 자신의 여자친구 오빠를 따라 학회에 왔다고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원밀리언에서 리아킴 선생님께 배웠던 안무 영상을 공유했다. 알렉스는 며칠 만에 안무를 습득했다. Apple, Meta, LinkedIn, Pinterest, eBay, Bloomberg, Criteo 등 빅테크 기업 참가 세션이 있던 날 알렉스와 재회해 점심을 먹으며 영상을 찍을 공간을 고민했다. 우리는 학회장 주변을 누비며 하루종일 영상을 찍었고, 꽤나 다채로운 배경의 영상을 모았다. 마지막으로 학회장 안에서 기록했던 춤 영상은 인스타그램에서 1만 조회수를 달성했다.
하루는 학회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러 오라는 USC Computer Science 교수님의 홍보 글을 봤다. Capital Laughs라는 코미디 클럽에서 생전 처음 아마추어 희극인들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관람했다. 아무 생각 없이 듣다 고민해 볼 만한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기도 했고, 순수 웃음이 터지게 한 내용도 있었다. 이후 구글 광고를 통해 평소 좋아하던 Kevin Hart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소식을 접하고 관람하기도 했다. 다른 학회 참석자와는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를 관람했다.
사람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느꼈다. 꼭 예술 분야가 아니더라도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일 말이다. 물론 나는 극단적으로 해 보지도 않았던 연극 연기/연출을 배우고 싶어 귀국 후 입시 학원에 등록해 4개월 간 고등학생들과 수업을 들었다. 회사 일과 병행하며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출과 예술사에 지원해 낙방하기도 했다. 반도체 수율을 높이기 위해 일을 하는 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2023년: 사람과 사유
연극영화과 입시 학원을 다니고부터 일주일에 연극을 3편씩 봤다. 현실적 고민 외에 인생에서 중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회사 일은 여전히 단조로웠고, 입사 때 기대했던 스타트업 특유의 빠른 시도와 실패, 약간은 불가능해 보이는 혁신 따위 없었다. 나의 성장을 위해 사내 최초로 해외 학회에 논문을 투고했다. 논문 발표를 위해 몬트리올에 다녀왔고, 당일치기로 방문한 뉴욕에서는 알렉스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몬트리올에 가기 얼마 전, 회사 부대표님께 술자리에서 커리어 관련 고민을 나눴다. 국책 과제 프로젝트 리드(Project Lead)로서 성과도 내고, 사내 최초로 논문을 냈는데도 회사의 빠른 성장 속도를 체감할 수 없었다. 더 이상 회사에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한 분야를 파는 걸 좋아하면서도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은 나는 AI 지식이 전무했던 제품 기획 팀과 제품 출시 경험이 전무했던 AI 팀 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직무 변경을 요청을 통해 제품 기획자(Product Owner, PO)로 전직했다.
나는 일을 맹목적으로 하지 못 하는 성격이다. 내가 하는 일의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 납득이 돼야 비로소 재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일은 일이니 큰 고민 없이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도 깨달았다. 일이 많을 때 워라밸을 타협할 순 있지만, 자기 일에 대한 큰 그림을 굳이 그려 보려 하지는 않는 듯했다. 이런 부류의 직원은 주어진 일을 빠르고 정확히 처리한다는 장점이 있다. 일을 끝내는 것이 목표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직이든 필요로 하고 환영할 만한 직원이다.
반대로 주어진 일의 목적과 가치부터 고민하는 직원이 있다. 이런 부류의 직원은 일 처리 속도가 느릴 순 있지만 조직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반복 작업이나 잡무의 경우 빠르게 처리하는 게 답이지만, 제품의 '주인' 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품에 대한 고민뿐 아니라 cross-functional 팀 간 소통, 업무 일정 관리, 고객사 미팅, 경쟁사 조사 등 제품의 비전 실현을 위한 업무부터 자잘한 잡무까지 도맡아 해야 한다. 퇴사 때까지의 짧다면 짧은 PO 생활동안 제품을 기획하고 데모를 출시하며 몸소 체험하고 배운 점들이다.
PO 업무는 그 자체만으로 입사 때와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동기 부여가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책임감이었다. PO로서 내린 결정이 제품의 가치와 스쿼드원들의 스트레스 수준을 결정했다. 출시일이 밀릴 때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성을 되찾고 목표를 재설정했다. 밤새 작업하는 개발자들이 혹여나 제품 관련 질문이 있을 때 답해 주기 위해 아침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찌어찌 데모로 쓸 만한 근본 원인 분석(Root Cause Analysis, RCA) 솔루션을 만들었다. 여러 고객사에 직접 제품을 시연해 보고 괜찮은 결과도 얻었다. 회사에 없던 Keep, Problem, Try(KPT) 회고 문화를 도입해 같이 작업했던 스쿼드원들의 피드백도 전부 기록했다.
치열했던 PO로서의 4개월을 보낸 후 비로소 다시 '나'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 한 회사에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프로젝트 리드, 프로덕트 오너를 맡아 봤다. 그런데 여전히 이 조직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성장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은 굴러가는데 일만 꾸역꾸역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회사 생활 동안 자신을 관찰하며 정립한목표와 가치관에 부합하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기 일과 자신의 삶에 대해 사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반도체 설비 효율 향상을 통해 필드 엔지니어의 업무를 지원하고, 자동차 출고 시간을 줄여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도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조금 더 직접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가져올 임팩트와 보람은 어떨지 궁금했다. 앞으로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당장의 가치관을 관철하지 않는 것도 이상할 일이다. 퇴사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