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또 올지 모르겠어 그래도 잠시만 안녕
기껏 랭커스터로 돌아와 마음을 추스르려 해 보았건만, 논문 제출이 코앞이건만!!!
엄선된 어셈블리 공연들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나의 The Company Pass가 책상에서 울고 있었다. (그냥 내 생각이겠지. 스스로 합리화 1. ) 아직도 페스티벌이 끝나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뭐 하는 거냐며.
기차표를 검색했다. 어라? 생각보다 저렴한데?
에든버러에서 하루를 숙박하면 제일 싼 도미토리를 찾아도 65~80파운드 (12~15만 원선)를 내야 하는데, 랭커스터에서 에든버러 왕복 기차표가 35파운드 밖에 하지 않는다. 이거야 말로 럭키 아닌가. 6만 원이 적은 돈이 아님에도 나는 어느새 카드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저질렀다!
정말이지 '공부 빼고는 다 하는 유학생'- 나의 인스타그램 채널 명에 너무도 걸맞은 삶이 아닐 수 없다. 논문 마감을 2주 남짓 남기고 페스티벌에 두 번이나 다녀오겠다는 마음을 먹다니. (이 정성으로 공부를 하란 말이야...)
귀한 시간을 쪼개어 다녀오는 만큼 낭비란 있을 수 없다. 시간표도 아주 알차게 짜 두었다. 스스로 뿌듯!
아침 7시 기차를 타고는 9시 언저리에 에든버러에 떨어져서 공연 7개를 달리고, 밤 12시 반에 돌아오는 기차를 타는, 조금은 미친 것 같은 일정이다. 기차를 타고 기절해 버리면 되지 흐흐.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라며 스스로 합리화 2.
아침잠이 많은 나는 이렇게 이른 일정은 사실 버겁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에 좀체 잠을 잘 들지 못하는 때문이다. 죄책감 때문인지 논문 본문을 꾸역꾸역 쓰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뒤척이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ASDA에서 저렴한 Meal Deal 세트를 사서 기차를 탈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여유롭진 않다. '그냥 굶어 인마. 뭘 또 꾸역꾸역 먹겠다고'
거의 경보에 가깝게 발을 굴러 일곱 시를 10분 정도 남기고 기차역에 가까워져 가는데 메일이 띠링하고 울린다.
"07:00에 출발하는 에든버러행 기차가 지연되어... 07:05로..."
그래, 그럼 그렇지. 영국 기차가 지연이 없으면 섭섭하지. 뭐 5분 정도야. 라면서
하도 빨리 걸어서 쟁쟁거리는 발바닥을 달래려 걸음을 슬쩍 늦추는데 메일이 띠링하고 또 온다.
"07:05에 지연 출발하려던 에든버러행 기차가 더욱 지연되어 07:14..."
이쯤 되면 약간 불안하다. 뭐지.
그때부터 1분 간격으로 메일이 오기 시작한다. 5분, 7분, 10분이 늦어지고 있다!
그래, 이런 지연에도 이제 웃음마저 나오는 거 보니 나도 슬슬 영국에 적응을 하고 있나 보다.
대합실에 앉아서 첫 공연 시간을 역산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지연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늦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 기차는 8:13분에 도착하여 08:15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하오며, 오늘 지연되신 어떤 티켓도 상관없이 이 기차를 타고 에든버러- 글래스고우로 가실 수 있습니다"
뭐라고?? 결국 한 시간이 넘게 지연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대합실에서 방송을 듣던 사람들이 전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한 여자가 흥분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 뭐라 난리부르스를 한다. 열차 지연 소식에 저렇게나 흥분하는 걸 보면 분명 영국인은 아닐 터.
전화를 끊고 난 그녀에게 한 노부부가 넌지시 말을 건다.
"어디 급하게 가야 되나 봐?"
"네. 오늘 직장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데 정말 늦었잖아요!! 망할!!"
"하하. 이렇게나 흥분해서야. 일찍 도착해도 차분히 발표하긴 어렵겠는 걸?"
"그러니까요!"
대합실에 있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서로 자신이 더 중대한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여 깔깔 댄다. 끼어들어 "나도 첫 공연이 열 시인데 이대로면 공연을 놓쳐버린다고요!"라고 하고 싶은데. 다들 직장에 관련된 일들이라, 놀러 가는 주제에 열을 낼 수는 없어서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것도 그렇고 이런 기약 없는 기다림은 너무 피곤하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한 기차에 몸을 뉘이니 도착시간은 열 한시로 찍히고 있었다. 첫 공연은 이미 날렸고 두 번째 공연도 간당간당하게 가겠네. 원하는 대로 제때 되는 게 없는, 변수로 가득한 나라인 건 알지만 오늘은 좀 봐주지.
이다지도 어렵사리 일주일 만에 도착한 에든버러는 여전히 활기차다. 백파이프를 불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체크 치마 아저씨, 한 걸음마다 사진을 남기며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 들, 선글라스를 쓰고 슈트케이스를 들들들 거리며 끌고 두리번두리번 숙소를 찾는 관광객들, 호객하는 공연자들, 그 와중에도 그림을 그려 파는 아티스트들로 북적이는 이곳. 여전히 살아 있다.
아래부터는 저번 편과 같이 간단한 공연정보와 함께 번역한 공연 설명과 나의 소감을 곁들여 둔다. 이 글이 발행될 즈음이면 프린지는 끝났을 것 같지만 대부분의 공연자가 다른 페스티벌에서도 공연을 하니,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다.
Company name : Yazmin Monet Watkins
시인 야즈민 모네 왓킨스의 최근 시집을 바탕으로 한 다학제적 퍼포먼스 작품이다. 시와 유머, 롤러스케이팅을 통해 인종, 젠더, 퀴어성, 정의, 공동체, 자기 사랑, 그리고 물의 치유적 성질을 탐구한다. 이 작품은 흑인 여성들을 향한 사랑의 편지이자 긍정의 선언문으로,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흑인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공연 속에서는 시와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어우러진다.
포스터의 청량함이 나를 잡아 끈 공연. 진주조개 위에 선, 롤러스케이트를 어깨에 멘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공연장에 도착하자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광장을 누비는 그녀. 입구에서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을 나누어 주길래 이게 뭔가 했더니 비눗방울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자신이 직접 쓴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와 나눌 거라고 이야기하며, 공감이 되거나, 응원해 주고 싶거나, 동의할 때에 "유~후!!" 혹은 "Snap(손가락 첫째와 셋째로 딱! 딱! 소리를 내는 것)" 혹은 이 비눗방울을 불어 달라고 했다. 참말로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운 응원 아닌가? 비눗방울로 하는 의사 표현. 나와 같은 극 I의 성향에게 적합한 응원 방식이다. 예쁘기도 하고.
포스터만 보면 무언가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몇 년 전 여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자신의 퀴어 정체성, 그리고 낙태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녀는 처음 롤러스케이트를 배우던 그 순간부터 현재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삶에 여전히 감사하며, 시를 쓰면서 더욱더 확고해진 스스로에 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관객인 우리들은 때로는 유후!로, 때로는 박수로, 때로는 비눗방울을 불며 그녀의 삶에 응원을 보냈다.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무대 위를 구르는 그녀는 그 자체로 참 행복해 보였다. 나는 쉴 새 없이 방울을 만들어 그녀에게 날려 보냈다. 공감해요. 당신은 멋져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 말이 맞아요.
어머니가 떠난 후 한참을 슬퍼하던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마냥 슬퍼하는 걸 어머니가 바라지는 않으실 거라고. 여전히 곁에서 자신을 응원하면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시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어머니에게 "나를 보고 있다면, 누군가를 통해 나에게 말을 걸고 싶다면, 내가 알아볼 수 있게 깃털로 날아와 주세요. 그러면 엄마인 줄 알게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눈물이 가득 찬 얼굴로 우리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나서 엄마는 꽤나 자주, 나에게 찾아왔어요"
후우-후우-, 우리는 비눗방울을 공간이 가득히 채워지도록 불었다. 눈앞이 부옇게 흐리다. 엄마라는 존재가 세상에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웃으면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어쩐지 공연 중간부터 그녀를 꼬옥 안아주고 싶어졌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녀를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설령 만난다고 해도 갑자기 관객이 안아준다고 하면 당연히 싫겠지? 그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나도 참.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저 멀리에서 그녀가 주섬 주섬 리플릿을 챙겨 나오는 게 보인다.
"안녕, 공연 너무 잘 봤어!"
"고마워, 잘 보았다니 다행이다. 이름이 뭐야?"
"난 시호야. 넌.. 넌 어떻게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웃을 수 있어?? 나는 못 그럴 것 같아..." 괜히 또 울음이 터진다.
"맞아... 어렵지. 그런데 계속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 오더라고. 그리고, 오! 이것 봐"
그녀가 가리킨 허공에선 하얀 깃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여긴 새도 없는데 어디서 갑자기 깃털이??
내가 놀라워하고 있자 그녀가 말했다.
"시호, Can I Hug you??"
뭐? 그건 내가 하고 싶던 말인데.
"그건 내가 아까부터 하고 싶던 말이야. 공연 중간부터, 계속 널 한번 꼬옥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우리 엄마가 나를 꼭 안아주고 싶으셨나 봐"
"그런 것 같아"
우리는 서로를 따뜻이 안아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꼭 이러했겠지. 오늘은 제가 당신을 대신했어요 어머니.
"고마워 시호"
"내가 고마워. 나, 인스타로 연락할게!"
누군가의 공연을 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마음을, 삶을 흘끗 본다는 뜻도 되는 것일까. 그녀의 이야기를 잠깐 들은 것 만으로 나는 그녀의 삶에 한 발치 다가가 있었다.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 Dream Space로 향한다. 내용은 저번 편에 실었기 때문에 따로 쓰지 않지만 내가 없는 사이 이 공연이 상을 두 개나 탔다. 아이들과 어른 할 것 없이 찡하고, 즐겁고, 행복한 이 공연에 점수를 낮게 준다면 그것이 이상한 거겠지. 잠시나마 매니저로서 이들과 함께 했다는 게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함께 거리에서 리플릿을 돌리고, BBC가 촬영하고 있는 걸 보고 고래 퍼펫을 들이밀면서 촬영분량을 뽑곤 했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창작집단 싹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요!!
다음 공연은 발레와 비보이가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제목과 내용을 적어야 하는데 사실, 이 공연에서 큰 감흥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적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나, 좀 멋있지? 라며" 몸짱임을 과시하려는 남자 무용수들과 극도의 라인 강조로 예쁨을 과시하려는 여자 무용수들이 한 시간 동안 섞어찌개로 무대를 채우는 것이 조금 지겨웠달까. 열심히 하는 것은 알겠지만, 앞선 공연에서 이미 너무 큰 울림과 쓰다듬을 받고 온 탓에 이제 이런 '쇼'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일지도. 예의상 박수를 치고 공연장을 나서는데 오, 다음 타임에 아프리카 댄스가 있잖은가?? 예정대로면 쉬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 Imitator로 가야 하는데 예전부터 궁금했던 아프리카 댄스가 발목을 잡는다. 게다가 시간도 겹치는데 어쩌지.
어쩔 수 없지! 보다가 중간에 나오는 누를 범하더라도 오늘은 욕심을 부려야겠다. 하루니까!
아프리카 리듬에 몸이 들썩임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150명은 돼 보이는 관객이 모두 백발이 성성한 중, 노년층이라 고개만 끄덕끄덕. 이런!!! 난 함께 무대에 올라 춤이라도 추고 싶은데!
앞서 너무 정형화된 춤만 보다가 내러티브와 흥, 그리고 리듬과 땀이 더해진 공연을 보니 마음이 다시 흐뭇-해 진다. 역시 나는 날 것! 야생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아프리카 전통의상을 입거나 하지 않고 동시대 가장 핫한 의상을 입고(뉴에라, 반짝이 덩크로우 등), 디지털 영상을 사용한 시도도 꽤나 흥미롭다. 공연의 내용 자체도 도시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근본을 잃어가는 아프리카 청년들에게 자연을 상징하는 한 청년 (극에서는 왕따처럼 묘사된다)이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내용처럼 느껴진다. 왜 '느껴진다'라고 하냐면... 공연을 반 만 보고 죄송스럽게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결말을 못 보고 나와 정말 죄송해요...
다음 공연 '이미테이터'는 미리 이 공연을 보고 온 SSAK팀에게 강력 추천을 받았다. 사진이 없어 너무 아쉬운데... 한 사람이 모창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준 느낌이랄까? 다른 사람의 목소리나 흉내 낼 줄 알지 스스로 아무 재능이 없다고 느낀 한 남자가 생각의 틀을 전환해,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의 재능임을 깨닫고 사람들 앞에서 그 재능을 당당히 펼쳐 보이는 과정을 담았다.
엘비스 프레슬리부터 마이클 잭슨, 브루노 마스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그들의 표정, 숨소리까지 카피하는 그의 노력에 정말 기가 막혔다. 1인 70 역이라더니 정말 그러했다!! 아니 이런 공연을 패스 하나 있다고 무료로 보고 있는 게 황송할 정도... 그리고 1인극으로서의 플롯이 너무 훌륭해서 배울 점도 많았다.
이 공연은 완전히 어둠 속에서 상연되며, 시각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연극이다. 작품은 암 치료를 동시에 받고 있는 하녀와 고용주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녀는 거의 완치된 상태이고, 고용주는 이제 막 항암치료를 시작한 단계에 있다.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은 가벼움과 유머, 섬세함 속에서 전개되며 질병이 지닌 정서적·사회적·행동적 측면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시각장애인 배우와 비 장애인이 함께 하는 공연은 어떤 모습일까? 미리 평을 읽어보니 모든 불이 꺼진 캄캄한 공간에서의, 단지 청각과 후각만으로 상상하는 공연이라고 하던데. 궁금함이 커 미리부터 예매해 두었다.
장소에 도착하자 시각장애인 배우가 우리를 안내한다. 서로가 서로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공연장(공연실)으로 이동한다. 손톱만큼의 불빛도 없는 공간. 배우는 휴대폰을 모두 꺼 달라고 말한다. 무음조차도 화면에 빛이 깜박이기 때문에 공연에 집중이 어려울 거라고.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의자에 앉았다. 살면서 이 정도까지 어두운 공간에 있어본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같은 공간 안에 누가, 얼마나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양쪽 벽에 밀착하여 둘러앉은 40여 분 동안 우리는 그들의 대화, 말투, 그리고 우리를 스쳐갈 때 나는 향기 나 냄새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상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공연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냄새'.
노크 후 누군가 들어올 때의 향수 냄새, 그리고 옆 집이 요리하는 씬에서의 소시지 냄새, 토스트를 태우는 냄새 등 다양한 냄새들로 우리는 시공간을 매번 새로이 상상할 수 있었다. 얼마나 가깝고 먼 지는 알 수 없지만 어둠에 익숙해지니 차츰 목소리도, 나를 지나는 바람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불편하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세상 깜깜한 공간에서 이 배우들은 가장 자유로운 것 같았다. 한 번도 우리와 부딪히지 않고 공간을 빠르게 걷거나 뛰었으며, 보이지도 않는 공간에서 소품을 잘 도 꺼내어 사용했다. 그저 나만이 이 공간에서 가장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었다. 하하하. 비 장애인이 불편을 느끼고, 장애인이 편안함을 느끼는 이 순간, 무언가 통렬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없으니 대사와 내용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효과도 있었다. 얼굴이나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목소리로 감정을 짐작해야 하는데 전혀 새로운, 여태껏 쓰지 않던 귀가 트인 느낌이었다. 영국에 와서 다양한 장애인 연극을 접하면서 이렇게 또 다른 배움을 가져간다.
무언가 엄청나게 시선을 잡아끄는 비주얼의 포스터로, 거리를 오갈 때마다 저 공연은 꼭 보리라, 꼭 보리라 다짐했는데 공연 시간이 무려 밤 열 시 반인 때문에 한 번도 성공하질 못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자정이 넘느니 만큼, 이 공연은 에든버러 아트 투어의 피날레가 될 것이자 기차에서 맘 놓고 잠들 수 있는 기분 좋은 피곤함(?)을 선사해 줄 것이기에.
후기를 쓰려 포스터를 다시 보니 아델레이드 프린지 위너, 멜버른 프린지 노미니? 게다가 별점 5개 등등 워낙 알려진 사람이었구나?? 몰라봐서 죄송해요. 하하.
와, 그런데 이 사람 정말 별 다섯 개 받을 만하다. 장장 한 시간을 엄청난 입담을 쏟아 내며 관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세상에 밤 열한 시에 이게 웬 텐션인가 싶다. 아, 설마 하루 종일 쉬다가 밤 열 시에 한번 장렬하게 자신을 태우는 불나방 타입인가.
공연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다. 피피티 사용, 포스터, 대형 포스터, 사운드, 소품, 관객참여를 적절히 이끌어 내며 무대 위에서 관객과 함께 즉흥을 펼치질 않나... 심지어 자신과 대화했던 관객들의 이름을 한 번씩 물어보면서 밀당을 하는데 나중에 그 이름들을 다 기억해서 다른 코너에 사용하거나, 무대 위로 불러낸다. 사람이름을 정말 못 외우는 나로서는 그 능력이 대단하고 부러웠다. 어쩐 일인지 나는 이런 똑똑한 공연을 볼 때마다 자꾸 반성을 하게 되는 게... 이름 못 외우는 것도 사실 머리가 나빠서라기보다는 그냥 성의가 부족한 거 아닐까.
간혹 선을 넘나드는 개그도 있었는데 역시나 영국 관객들은 호쾌히,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지러 질듯 웃으며 기꺼이 그 희생양이 되기를 꺼리지 않는다. 거참.
공연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양껏 웃다 보니 열한 시 반이 되었다.
(포스터에서 느껴지듯) 나르시시즘이 모토인 이 배우는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해준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며, 공연장 밖에서 향수, 스티커 등을 구매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자신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이 향수가 얼마나 좋냐 하면 무슨 오일, 무슨 오일, 무슨 향료, 알코올, 먼지 등등이 들어갔다고.
진지한 얼굴로 마지막까지 개그부심을 잃지 않는 그대는 정녕 프로가 맞소.
- 에든버러에서 처음 본 풍경이긴 한데, 1인극을 마친 배우가 공연이 끝나자마자 달려 나와서 그렇게 열심히 굿즈 판매를 하는 모습.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게나 간절한가 싶기도 하고.. 어쩐지 배우 본인이 파니까 안 사줄 수 없기도 한(?) 교묘한 마케팅인 것 같다-
향수라니 독특한 걸? 시향해 보니 향이 나쁘지 않다. 조금 우디 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바닐라 향도 나면서... 꼭 배우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이 향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남자 향수 같긴 하지만 오늘의 마지막 공연 아니 에든버러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기념할 겸, 한밤 중에 저렇게나 열연한 배우를 응원할 겸, 나쁘지 않은 구매인 듯하여 미니 사이즈(시향 하는 사이즈 정도인데 8파운드나 한다, 헉!) 향수와 마지막 한 장 남은 스티커를 샀다. 사인까지 받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스태프가 자꾸 사인을 받으라고 부추겨서 사인도 받았다.
그래, 이렇게 에든버러의 번갯불에 공연 구워 먹는 하루는 끝이 났다. 아이고 피곤해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정신없이 날고뛰고 땀나는 하루였지만 어엄청나게 알찼다. 암. 그렇고 말고.
내년에 내가 에든버러에 다시 오게 될까?
관객으로? 혹은 공연자로?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몇 번이고 뒤돌아 보며, 이미 찍은 사진을 한 장 두 장 다시 찍으며
나는 기어코 이곳에 마음을 두고 간다.
나중에 꼭 찾으러 올게! 잘 있어 에든버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