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나 싶은 그런 날
처음이었다. 일 년 남짓을 영국에 살면서 ‘집 밖에서 밥을 사 먹는’ 것은.
아무 정함도 없이 무작정 시내로 나가 가장 대기가 긴 브런치 카페에 들어서 본다.
만석이라 밖에서 삼십분을 기다려야 했고 갑자기 부슬비까지 내렸지만 상관없었다.
가격을 신경쓰지 않고 가장 맘에 드는 메뉴를 주문한다. 연어 에그베네딕트(13£)와 비트 라떼(4.5£), 삼만 사 천원짜리 점심…저번 주까지의 나 라면 가당치도 않은 행보다.
그냥, 이러고 싶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쪼아맨 머리를 하고 “밥은 집에서 해먹어야 싸게 먹히지” 라며 억척이던 또 다른 나를, 오늘은 기어코 침대 다리에 묶어두고 나왔으니까.
“Beetroot Latte for you, my love! (비트 라떼 여깄어요)”
비트 라떼가 먼저 나왔다. 곱게 하트가 그려진 것이 망가트리기 싫은 비주얼이다. 아아 고녀석 따숩겠다.
아차, 먹기 전에 사진부터 찍어야지 라고 생각하다가
왜? 어디 보여주려고? 먹으려고 시켰는데 왜 어디 올릴 생각부터 해. 습관처럼 사진을 찍으려 핸드폰을 찾는 내 손아귀에 염증이 났다. 좀! 오늘 만이라도 좀 참아봐.
나는 폰을 카운터에 충전해 달라 맡겨버렸다. 그럴싸하게 나올때까지 몇 번이고 찍었을, 기록의 압박없이 들이킨 핑크색 첫 모금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아, 너무 좋다.
갑자기 눈물이 피잉 차올랐다.
뭐야 이거.
스스로 다그쳐 물어보아도 한마디로 설명은 어려웠다.
지금껏 나 자신에게 라떼 한 잔을 못 사주고, 투명한 비닐 지갑을 매번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만 거렸던, ‘2.99파운드면…오천원이야. 안돼’ 라며 돌아선 그 많은 시간이 안됐기도 - 불쌍하기도 - 대견하기도 해서 일까.
모르는 사람들이야 “유학? 너 부모님이 여태(?) 밀어주시는구나? “ 라고
눈을 흘겨뜨고 말 하겠지만
나는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스스로의 선택에는 - 감당도 스스로] 라는 원칙을 만들었기에
여기 오면서 누구의 도움도 빚도 지지 않았다.
쉽진 않았지만 약간은 빠듯한 채, 그렇게 나는
이 곳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거다.
그래. 그게 벌써 일 년이니
머지 않아 이곳과도 이별이겠지.
어쩌면 나는 '만나자 안녕'을 할 생각에 슬퍼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동기들은 거진 랭커스터를 떠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몇 남지 않은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이냐” “비자는 신청했냐” “돌아갈거냐” “남을 거냐” 같은 질문들을 주고 받지만 결국 모든 질문에 같은 대답을 삼키고야 만다.
“I don’t know...”
원래도 한 치 앞을 모르던 삶이, 여기 와 있다고 해서 새 안경알 끼우듯 명징해 질리 없지만 어떤 것들은 의외로 또렷해진다.
취미이던 글쓰기가 이제는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되고, 한 때 했었지만 지금은 거의 놓아버린 연기는 여기서 외려 반응이 좋다. 앞으로 점차 더 쌓아 나가야지 라고 생각한 연구며 공부는 아 얘는 나랑 안맞구나. 그만 헤어지자 라고 D-day까지 세며 다짐하는 중.
명확해 진 것이 또 하나 있다.
‘관계’.
이 역시도 예상과는 늘상 다르고야 마는 신기한 녀석이다.
만물이 그러하듯 관계 또한 잡아둘 수도, 잡혀 있을 수도 없는
그저 ‘흐르는 것’이란 걸 자꾸만 느끼게 된다.
그러니 슬퍼할 것도, 섭섭할 것도 없겠지.
떠날 생각을 하니 먼저 차오르고야 마는
- 마음보다 먼저 마중나오는- 따뜻한 눈물 정도가
아, 그래도 내가 이곳의 삶에 충실했구나를 말해주는 듯 하다.
그래, 너 열심히 살았구나. 정말 그랬구나.
이 낯선 땅에서
낄낄 거리며,
흑흑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