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더라
자타 공인 맥시멀리스트인 나는 어딜 가든 끌고 다니는 짐이 많은 편이다.
맥시멀리스트라면 한 곳에 정착해서 살면 참 좋을텐데 나란 인간은 노마드 기질까지 있어서
늘 바리바리 + 억척억척스러움을 탑재하고 낑낑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영국에 올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못해도 2년 정도는 영국에 살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물가 비싼 영국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언가를 현지에서 사려고 하기 보다는 >> '이미 차고 넘치는 내 물건들을 최대한 가져가 활용하는 것이 절약이다'라는 판단(MISS)하에 대형 이사박스로 연거푸 선박 택배를 부친 것.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나의 이런 판단 미스는 결국 체력낭비, 탄소낭비, 비용낭비로 이어졌다.
- 영국은 필기도구가 정말 질이 나쁘다던데 볼펜세트, 형광펜, 연필, 연필깎이, 지우개 가져가자 : 생각보다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쓸 일이 많지 않았음.
- 신발도 T.P.O에 맞춰야 하니 운동화 두개, 샌들 하나, 장화 하나, 부츠 하나, 구두 하나, 크록스, 슬리퍼...: 매일 운동화만 신게 되고 크록스 정도는 가끔 집 앞에 나갈 때 신지만 부츠, 구두? 신을 일 없음
- 옷 또한 봄, 가을, 겨울 옷 다 챙겨가자. 파티에 대비한 드레스도..., 아 메이크업 도구들도! : 드레스 입을 일없음. 대학생이었다면 긴 시간 이래저래 멋도 내고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9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논문을 끝내야 하는 압축된 시간을 사는 석사생에게 멋과 화장은 사치. 결국 면바지 몇개와 트레이닝 팬츠를 새로 사서 매번 돌려 빨아입었을 따름.
- 책 : 이건 사바사이겠지만 나는 한국에서 낑낑대고 들고 간 책의 단 3페이지도 안 펼쳐보았다. 부끄럽다.. 괜히 책들이 나와 함께 여행만 한 셈
- 음식 재료: 영국 가면 못구한다는 노파심에 바리바리 싸온 고추장, 된장, 라면 등등... 사실 엔간한 건 다 판다. 하지만 정말 질이 좋은 장 류, 국산 참깨, 참기름, 건조 블럭 국, 미역, 누룽지, 비건 다시다나 코인육수 같은 것들은 사 오길 잘 한 것 같다. 소스나 면, 양념 같은 것들은 그냥 만들어 먹거나 사는게 쌌다.
- 텀블러: 환경을 생각한다고 텀블러도 보온용, 일반용, 스탠리 대형컵 등 종류별로 3-4개는 가져왔는데 여기 있으니 무슨 행사마다 텀블러와 컵을 준다. 결국 이것도 들고 올 필요 없었다. 괜히 비싼걸 들고와서 어디 기증도 못하고 다시 고스란히 들고가야 한다.
정리하고 보니 딱히 가져올 필요가 있는 것도 없었다. 멀티탭이니 탁상 전등이니는 인터넷으로 저렴하게 주문했고, 옷은 채러티 숍에서 2-4파운드(4-8천원선)에 구매해서 리폼을 하거나 겹쳐입거나 하며 아주 잘 입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가져간 옷을 거진 안 입은 것 같다. 생각해보니 쓰던 물건을 국제택배로 받아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절약이 아니라 오히려 낭비였다!. 한국-> 영국으로 배로 물건을 배송할 때 15-20키로에 약 12-15만원 정도가 들었는데, 시간은 또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거의 2-3개월이 지나 잊혀질 만한 때나 되야 도착 했다.
짐을 부치러 우체국 까지 그 무거운 박스를 낑낑대고 옮겼을 가족들과, 그 물건들이 오기까지 기다린 시간, 그리고 지출한 몇십만원들을 생각하면... 그걸 받지 않았으면 그 몇십만원 정도가 내 한달치 생활비가 되었을 터.
지금에 와서 후회는 되지만 나름의 레슨이겠지. 다시 안 이러면 되지.
처음 지냈던 기숙사를 나와 지금 숙소로 첫 이사를 하며 깨달은 건 내가 한국에서 2차, 3차로 받은 물건들을 거의 사용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사를 도와준 분의 차에 다 들어가지도 않아 3박스 중에 한 박스분량은 채러티 샵에 기증했다. 영국까지나 가져와야 비로소 버려질 수 있었던, 정말 뭐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나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다. 고작 1년 남짓을 살을 거면서 거의 짐은 10년치로 보였다.
(한숨)
40년을 이런 스스로를 바라보며 살았다.
물건들, 추억들, 누군가와의 기록들로 가득한 한국의 내 방이 오버랩되었다.
방이 어지러운 사람은 삶도 그렇다던데 정말 내가 그러했다.
정리.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영국에서의 삶이 터닝포인트가 되려면 아직도 꽤 많이 덜어내야 했다. 원래의 나에게서 조금은 나아진 나로 살고 싶어 여기까지 와 있으면서도 여전히, 여전히 나는
미련이라던가 기대, 아쉬움 같은 - 혹은 이미 유통기한이 다 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관계같은 것들을 끈에 매달아 빈 깡통마냥 요란하게 와장창창창 거리면서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고 있구나.
징그럽다.
내가 그러모은 이 모든 것들이 꼴보기 싫은 순간이 또 왔다.
정리가 절실하다.
삶을 주렁 주렁 이고지고 다니는 만큼
깎이는 체력과 좁아진 이동거리, 그리고 한 층 노쇠해진 내가 자꾸 밟혔다. 가벼워 질 때다.
책상에 아무것도 없이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만 있고 싶다.
당장 이사를 가더라도 가방 하나에 모든게 들어갈 수 있는... 이건 무리겠지. 욕심 내지말자.
차근차근 하나 둘 씩 줄여보기로 한다. 기증을 하면서 기분도 좋아 질 수 있고.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유학생 신분이고, 밑도 끝도 없이 나눠주기만 하기에는
이 물건들에 들인 돈이 이미 너무 많지.
중고거래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검색해 가입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당근마켓 이라고 할 수 있는 Gumtree는 역시 시골마을인 랭커스터에서는 쓸모가 없다. 몇 달을 써 보았지만 매물도 없고 구매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3개월간 한 건? 참담한 수준.
그렇지만 Vinted (온라인 중고마켓) 이라면 어떨까??? 동네와 상관없이 배송을 해주는 시스템이 훨씬 유리할지도?? 나도 드디어 짐의 늪에서 구원 받을 수 있을지도??
Vinted와 함께 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조금 더 이어보기로 하고
일전에 친한 친구가 일주일에 한번은
집에서 필요없는 물건 두 개씩을 찾아내어 버리거나 기증한다던데 그런 습관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줄이기.
물건도 줄이면서
내 배도 좀 주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