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기 찬스는 행복해
한국에 도착해서 짧았던 두 달이 눈 깜짝 할 새 사라졌다.
제 3자의 눈으로, 마치 이방인 처럼 살면서 한국에 적응해 보려 했는데.
적응?
영국에서의 1년이 마치 없던 일 처럼, 한국에 돌아온 나는 시차 적응 조차 없이 어느 새 한국형 인간으로 동기화 되어있었다. 하하. 38년이 넘게 산 곳을 고작 1년 지내고 온 기억이 덮을 리는 없지. 알지만 조금 섭섭하달까.
(자체 유배) 고성을 42일간 살다 오고 나니 어느 덧 12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학기가 끝나고 난 뒤 그간 나몰라라(?)하던 학교에서 계속 메일을 보내오는 걸 보니 아하, 바로 그 시기가 임박하고 있었다.
그렇다. 졸업! 졸업식이다!
메일의 내용인 즉슨 - 12월 11일에 너희 학과 졸업식이 있으니 참가할거면 참가 여부를 접수 양식에 기입해 제출하라는 것이다.
사실 마음의 확정을 아직 못 했다. 영국에서의 석사학위를 받는 첫 자리. 너무 영광스럽지만 정말 그 하루를 위해서 백 만원이 넘는 항공권과 숙박, 식비를 들이는 게 과연 합리적 소비인가. 그냥 온라인으로 시청 해도 되지 않을까... 집으로 학위증은 보내주지 않으려나. (낸 돈이 얼만데)
하루에도 '갈까, 말까? 그래도 이탈리아 할머니들께 간다고 했으니 가야겠지' 와 '지금 돈 도 안 벌고 있으면 서 거의 150에 육박하는 졸업식을 간다고?? 사치야!!!' 가 매일 마음속에서 싸웠다. 그래도 결국은 가는 쪽이 이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신청 폼을 클릭 해 들어가 보았다. 강당에서 일어날 졸업식 행사에 - 초대할 수 있는 자리는 두 자리가 제공되고 그 이상은 딱 두 자리에 한해 유료로 구매할 수 있다고. 엥?? 졸업식 관람석을 돈 받고 판다고?? 이건 또 금시초문이네.
게다가 다음 내용은 더 눈이 띠용- 이다.
바로 졸업 가운 대여, 인데 아니 이게 원래 돈을 받는 거였던가. 한국 대학에서 졸업식을 안 해봐서 (졸업식엘 안 가서) 몰랐던 건가... 등록금이 얼마나 비싼데 졸업 가운도 돈을 주고 빌려야 한다니. 이쯤 되면 졸업식도 학교 입장에서는 굉장한 돈이 되는 이벤트 임에 틀림이 없다. 내용을 보니 박사가운은 거의 9.5만원. 석사 가운은 8.4만원. 거기서 거기고 너무 비싸다. 에이휴. 졸업 가운을 그냥 빌리지 말까.
졸업식 자체도 갈까 말까 고민인데 부수적으로 이런 돈이 드니 또 마음이 짜게 식는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진'이 남아 있었다.
전문 사진가가 스튜디오에서 찍어주는 졸업 증명 사진. 각 패키지는 9만원부터 시작하고 (인화비 미포함) 패밀리 패키지는 20만원부터 시작이다. 와... 몇 장 찍지도 않는다고 들었는데 너무 하다. 그냥 내 디카를 가져가야 할 것 같다. 한 학생이 졸업식 참여를 신청하고 가운도 빌리고 사진도 하나 제일 저렴한 패키지로 찍으면 학생 1인당 (석사 기준) 8만 + 9만 = 17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못해도 한 단과 대학에 150명이라고 치면 우와... 엄청난 행사구나! 어쩐지 초반에 내가 답도 안 했더니 일 주일 내내 "졸업식이 다가와!" "사랑하는 랭커스터 학생 여러분, 명예로운 졸업식의 시작입니다" "아직 등록 안 하셨나요? 곧 마감됩니다!" 등 온갖 후킹 문구를 제목에 실은 메일을 보내 왔었지.
그래, 그래 알겠다. 우선은 비행기표부터 알아보자. 내가 가고자 해도 비행기 삯이 너무 비싸면 애초에 참여가 불가능한 거니까.
비행기를 알아보는데 오? 의외로 런던 왕복은 저렴한 표들이 많다. 홀리듯 아시아나 항공을 인천- 런던 왕복 90만원에 끊었다. 이 정도면 선방한 딜이다. 앗, 어찌저찌 하다 보니 나, 졸업식 가는 거구나!!!
어느 덧 날은 다가와 비행기에 오른다. 오랜만의 비행은 역시 고되다. 국적기이긴 해도 이코노미는 어쩔수 없이 답답하다. ㄱ자로 구부린 다리는 서너 시간이 지나자 슬슬 무릎에 기름을 치고 싶어 지는 뻑뻑함이 찾아온다. 안되겠다. 혹시라도 빈 자리가 두어개 붙은 곳이 있다면 가서 다리를 좀 뻗어야 겠다.
화장실을 가면서 좌우를 두리번 두리번, 눈에 불을 켜고 마치 승냥이 모냥으로 눕코노미가 가능한 곳을 찾는다. 앗, 럭키!! 세 자리가 빈 곳이 보인다. 조금은 당당한 애티튜드가 필요한 순간이다. 노트북으로 자리를 맡아두고 내 자리에서 핸드폰이며 물 등을 챙겨서 리드미컬하게 컴백한다.
속도감이 보이는가? 눕코노미를 위해 잽싸게 자리를 잡느라 사진도 이렇게 대충 찍어져 버렸다. 무려 14시간을 직항으로 구겨져서 가야 하는 나에게 이 3자리는 비즈니스 석에 버금가는 행운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잠깐 누워서 이 시간을 만끽하다 어느새 졸아버린 나는 잠을 깨우는 알람 소리 "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에 초속으로 일어나 바르고 정갈하게 앉았다.
첫 기내식을 흡족하게 받으며 영화 채널에서 "고래와 나"를 켰다.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볼 기회가 없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결과는...?
결론은 또 또 눈물 젖은 기내식 엔딩.
아니 왜왜왜 아무도 나에게 안 알려준 것인가! 이거 너무 슬픈 다큐멘터리영화라고.
계속 녹아가는 북극의 빙하때문에 결국 곰들은 먹을 것도 없는 잔디밭에서 뒹군다. 간혹 밀물이 들이차면 물속에 첨벙 해서 호기심 많은 벨루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모두에게 비극인 이 상황을 보면서 눈물만 주루룩. 아이고.
울다 지친(+배부른) 나는 이제 잠을 청해보기로 한다. 눕코노미 만세!!!!
눈 뜰 때쯤 런던에 거의 다다랐으면 좋겠다. 푸욱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