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이 된 느린아이
40대의 육아란? 남들보다 10년늦게 아이키우기 #5
보통 중국에 온 주재원들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여유있는 생활을 한다. 금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우리처럼 아이가 어릴 때(미취학) 온 사람들보다는 아이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때 오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엄마들도 골프를 치거나 가정부를 쓰면서 여러모로 편하게 산다. 그런데 나는 아이가 어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편이 한국에서보다 더 바빠져서 여유로운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남편은 밤12시이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고 주말에도 9시에 퇴근하는 모습으로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원래 기골이 장대한 편인 남편은 늘 90kg이상을 유지했는데 얼마나 힘들게 일을 했는지 10kg이나 빠져서 내가 보기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당연히 잘 쉬지못하니 늘 피곤해했고 예민하고 까칠해져 남편도 나도 너무 힘들었다. 하루는 내 생일에 모처럼 일찍 퇴근하겠다며 7시에 퇴근한 남편이 밥먹는 내내 전화기만 붙잡고 있는걸 보고 그냥 회사로 돌려보낸 적도 있다. 대련에 대한 여행서도 하나없는 판국에 어디 갈 곳도 없으니 나 역시 집에서 프로야구 스포츠채널만 열심히 봤다. 중국은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검열이 심하고, 전기나 인터넷이 먹통이 되는 날은 한달에 며칠이나 될 정도로 흔하다. 그러다보니 일년내내 무리없이 나오는 TV채널은 거의 스포츠채널이 유일할 정도여서 나는 그동안은 크게 관심도 없었던 프로야구를 열심히 보게되었다. 마침 2013년은 내 응원팀인 <두산>이 준플레이오프부터 극적으로 결승까지 올라가서 아쉽게 삼성에서 석패를 한 해라 나도 TV보기에 열심히 빠져 들었다.
한편 3살때부터 어린이집을 열심히 다닌 우리아이는 마침내 4살에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정말 필요한 말만 간단히 하는 녀석이었는데 갑자기 홍수가 나듯 말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의 변화가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때가되면 말을 하는것인가 싶어 유심히 살펴봤는데 늦게 말문이 터지긴했지만 우리아이는 발음이 너무 정확하고 구사하는 단어도 많고 다양했다. 그동안 포기하지않고 끊임없이 아이에게 말을 건넨 나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어지는 시점이었다. 말은 한국어를 했지만 아이의 중국어 실력도 늘어 적어도 듣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나보다 나았다. 나 역시 중국에서 중국어를 배웠는데 나이가 들어 중국어를 배우다보니 한 단어가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생각나는 모순이 발생해 나중에는 입가에서만 맴돌고 정작 말이 빨리 튀어나오지 않는 부작용도 겪곤했다. 어쨌든 아이가 이제 기저귀도 젖병도 떼었고 말도 했으니 정말 본격적인 교육할 때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에도 책을 가지고왔지만 아들녀석은 책에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했지만 의외로 친구들이랑 노는것보다는 집에서 꽁냥꽁냥 뭔가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걸 더 좋아했고 유달리 물을 좋아하는 것 외에는 어떤것에도 크게 흥미를 보이지않았다.
다만 내 중국어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무척 예뻐했는데 왜 예뻐하는지 나는 알길이 없었지만 그녀는 유달리 아들녀석을 예뻐해서 데리고 같이 산책도 가고, 도심에 놀러도 가고 (대련의 도심지는 내가 살고있는 곳에서 차로 거의 40분을 넘게 가야한다) 심지어 자기집에 초대도 했다. 우리 아이는 중국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졌는지 나랑 둘이 다니면 중국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 여기저기서 중국어를 꽤나 많이 들었다. 내가 사는곳은 두 블럭안에 모든 것이 다 위치해있는 곳이라 때론 편하기도 했지만 몹시 답답하기도 했다. 한국처럼 조금만 나가면 이것저것 있는 구조가 아니고 그 두 블럭을 벗어나면 최소한 차로 1시간이상 가야 또다른 번화가를 볼 수 있었기때문에 4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하는일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련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청정지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세먼지가 많고 공기가 안 좋았다. 우리나라였으면 난리날 일도 중국에서는 "뭘 이 정도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나는 중국에서 살면 살수록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특히 내가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중국인의 흡연습관으로, 중국은 실내에서의 흡연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흡연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아이와 둘이 타있는 엘리베이터에 담배를 피면서 탄 중국인에게 나는 한국어로 심한 욕을 내뱉었다. 그 중국인은 끝끝내 담배를 끄지 않았지만 뭔가 내가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한것만은 알아들은 듯했다.
남편이 중국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일한 결과가 좋지않아 중국에 온지 1년반만에 한국으로 들어갈 일이 생겼을 때에도 나는 역시 또 찬성을 했다. (회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중국에 그냥 남는 사람들도 많다) 다른 사람들은 교육때문에 쉽게 중국생활을 포기하지 못했지만 미취학아동을 둔 내게는 별로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5살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