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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이 된 느린아이

40대의 육아란? 남들보다 10년늦게 아이키우기 #10

by 시휴

취학전에는 한글에 신경쓰고, 1학년때는 수학을 신경쓰느라 영어는 돌아볼 틈도 없었던 나는 아이가 2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영어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가 다녔던 유치원에서는 영어학원을 병행하고 있었는데 3년을 (본격적으로 다닌 건 아니었지만) 영어를 배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알파벳도 제대로 몰랐다. 역시... 우리 애는 학원을 보내서는 답이 없겠구나를 다시 한 번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엄마표영어가 뭔지 알아보다가 <잠수네>를 알게되었고 이신애씨가 쓴 책을 다 검색해서 읽어보았다. 물론 여기저기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흘려듣기와 집중듣기, 그리고 리딩을 하게하면 영어는 저절로 된다는게 그녀의 핵심이론이었는데 내가 우리아이에게 당장 해줄 수 있었던 건 흘려듣기에 불과했다. 물론 몇번은 집중듣기를 하려고 시도를 해 보았으나 아이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일보후퇴를 하고, 리딩은 어떻게 해줘야할지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리딩에 대한 고민을 하던끝에 우연히 읽은 책에서 '영어그림책'의 존재에 대해 알게되었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못하던 수많은 그림책들이 있었고 그 영어그림책을 우리나라에 들여와서 번역한 한글책들을 추천도서라는 이름하에 내가 아이에게 읽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 그래서 나의 '영어그림책 읽어주기'프로젝트는 2학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어그림책>에 대한 책들은 이미 많이 나와있었고 관련책들을 한 10여권 탐독하자 어떻게 아이의 영어교육을 지도해야 좋을지 판단이 섰다.

아이는 흘려듣기조차 쉽사리 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무자막영어'에 대한 아이의 반발은 예상외로 거셌다. 왜 재미있는 한글TV를 놔두고 영어TV를 봐야하는지 이해를 못하자 나는 그냥 할 일중 하나로 '영어보기'를 끼워넣었다. 2학년때 아이의 할 일은 6개가 고작이었는데 그 중 2개를 영어보기에 할애했으나 나로서도 큰 맘을 먹은 것이다. 그때 아이의 하루일과는 비교적 단순해 학교를 다녀오면 영어보기 2개, 독서30분, 수학문제풀기/학습지숙제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쨌든 1학년때부터 시작한 학습습관잡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착이 잘 되어갔고 아이의 반발이 있어도 나는 국/영/수는 중요하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나도 아이를 경시대회에 내보내고 싶고, 시키고 싶었던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크게 마음쓰진 않았다. 다른 아이와 비교할 시간에 내 아이의 발달상황에만 오롯이 신경썼고,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너는 대기만성형이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를 잘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게 실제로 되든안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에겐 희망이, 또 믿음이 필요했으며 그것이 전부였다)


집에서 하는 공부는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더 큰 문제는 학교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2학년 담임선생님은 학년주임선생님이셨는데 아이들을 거의 군대식으로(?) 조련하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유달리 굼뜬 우리아이가 선생님의 눈에는 예쁘게 보이지 않으셨는지 "호강이 다 했니? 호강이가 다 했으면 우리반은 다 한거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고, 선생님의 말을 흉내낸 반 아이들이 아이에게 늦다는 지적 혹은 낙인을 찍기 시작했다. 아이는 선생님의 말에도 상처를 받았지만 반아이들이 자신에게 늦다는 지적을 하는것을 참기 힘들었는지 내게 고민을 토로해왔고 나 역시 이 위기를 어떻게하면 지혜롭게 넘길 수 있을지 고민했다. 며칠간의 고심끝에 나는 아이를 느리다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나는 느린게 아니고 신중한거야"라고 말해주라고 했다. '신중'이 뭔지 아는 아이라면 더이상 너를 놀리지 않을 것이고 신중한게 뭔지 몰라서 "신중이 뭐야?"라고 묻는 아이에게는 그것도 모르냐고 대답하라고 말이다. 아이는 학교에 가서 그대로 했고 아이가 느끼기엔 신기할 정도로 문제가 해결되는 걸 보면서 아이는 그 이후 학교에서 어려움이 생기면 나와 의논을 했다. 때때로 저학년 아이들은 별뜻없이 서로 심한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바로 화해하기도 하는등 어른의 눈으로 보면 의아할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관계가 변한다. 그래서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지않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잘 넘어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또 한번은 아이가 쪽지를 받아온 적 있었는데 칼그림이 그려져있는 쪽지였다. 뭔가 협박하는 것 같은 글귀와 함께 말이다. 이번에도 약간 고민이 되었지만 알림장에 그 쪽지를 붙여서 보냈고, 아이의 알림장을 확인하시던 담임선생님께서는 화들짝 놀라 우리아이와 그 아이를 불러 사실확인을 하신 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선생님은 그 이후 문제를 크게 만들지않고 자신에게 알려주어 고맙다며 정말 현명한 처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협박쪽지를 보냈던 아이의 엄마도 내게 사과전화를 해주셔서 일은 훈훈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나는 아이가 튀는성향이라 향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고 사춘기가 시작될때쯤에 어려운 일이 있다면 꼭 부모와 상의해주길 원했는데 첫단추를 잘 채운것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아이는 원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그 이후에는 엄마에 대한 믿음이 생겼는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야기했고, 우리는 합심해서 같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10살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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